[이근수의 무용평론] 변재범의 ‘곳’과 제40회 서울무용제 경연
[이근수의 무용평론] 변재범의 ‘곳’과 제40회 서울무용제 경연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3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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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올해로 40회를 맞는 서울무용제에는 8개 작품이 대극장 경연무대에 올랐다. 그 중에서는 변재범(댄스 컴퍼니 더 븟)이 안무한 ‘곳’(11,24, 아르코대극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대 좌우를 가로지르며 길게 늘어선 줄 하나가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다. 안무가가 그려놓고 있는 상상의 줄이다. 땅에서 10m 쯤 올라선 곳, 사람들이 가장 공포감을 느낀다는 높이에 걸려있는 외줄을 상징한다. 오른 쪽 끝에서 한 발짝 한 발짝 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줄타기 광대(변재범)가 왼쪽으로 이동해간다. 줄 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광대의 긴장이 느껴진다. 여자 무용수(이성희)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같이 뒤 따르는 장면으로 무대가 열린다. 줄 위를 걸으며 지켜보는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광대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어두움과 침묵가운데 매달린 외줄 위 광대는 그만큼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에 집중해야한다. 줄을 다 건너왔다. 끝자락에 주인을 기다리는 지게가 조명을 받으며 받혀져 있다. 검정색의 남자 넷과 흰 옷의 여자 셋이 등장한다. 무대를 비추는 조영행의 조명은 감각적이다. 천정에서 쏟아지는 삼각추모양의 조명이 무대를 셋으로 분할하면 무대 중심은 세 개가 되고 조명이 직선으로 내려와 무용수들을 차례로 비추면 군무진속의 한 사람 한사람이 각각 주역이 된다. 하나 둘... 다섯 여섯.., 열여섯 일곱...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광대가 줄 위를 걸으며 조심스럽게 세는 발자국 수일 것이다. 작품의 텍스트는 김민기의 시 ‘봉우리’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작은 봉우리 이야기 해줄까“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봉우리/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나에겐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에/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무대를 적시듯 공연의 전 편에 걸쳐 낮게 깔리는 김재덕의 음악은 춤과 닮았다. 텍스트와 음악, 조명과 의상(민천홍)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김원영이 이끄는 9명 무용수들의 춤이 고급스러운 무대를 만들어낸다. 특정한 무용수를 내세우지 않고 군무가 위주인 춤사위는 모두 줄 위를 걷는 광대의 느리면서도 균일한 춤을 패러디한 것이다. 변재범에게 줄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상징한다. 외줄 위의 광대처럼 조심스럽게, 긴장하면서 세상을 살아야한다는 메시지가 읽혀진다. 좋은 무용수가 반드시 좋은 안무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아무용콩쿨 은상(2007)과 금상(2008)에 빛나는 변재범은 좋은 무용수가 훌륭한 안무가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서울무용제 경연부문(11.20~27, 아르코 대극장) 본선에 오른 8개 작품 중 첫날 2 개를 제외한  6개 작품을 모두 보았다. 대상 수상작으로 발표된 ‘인술라이’(Insulae, 신종철)는 현대의 주거패턴으로 자리 잡은 아파트의 생활상을 여러 개의 특징으로 포착하여 에피소드 식으로 보여주었다. 소재의 창의성이 있었으나 ‘기승승승(起承承承)’으로 이어지는 평면적인 전개에서 전하고자한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아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최우수상을 받은 ‘갇힌 자의 위로’(안귀호)는 서울무용제의 수상조건에 맞춤식으로 제작된 느낌을 주었다. 연출이 안정적이고 무용수들의 고른 춤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1990년대 작품을 다시 보는 듯 참신성이 부족했다.  

7명의 심사위원명단과 함께 공개된 개별채점 결과를 보면 평가자의 자질과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관객들이 간접적으로 작품평가에 참여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어 바람직한 관행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장르 편파적이고 점수 몰아주기 식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거나, 작품에 대한 변별능력이 의문시되는 경우가 눈에 띈 것은 아쉬웠다. 선입견을 갖지 않는 심사위원을 선택하고 공정 심사를 독려하는 것은 한국무용협회(조남규)의 신뢰성을 되찾기 위한 필수적 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