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해란강의 女灵들, 그 70여년의 여정
[성기숙의 문화읽기] 해란강의 女灵들, 그 70여년의 여정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19.12.3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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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br>
▲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국민가곡 ‘선구자’의 한 구절이다. 일송정! 중국 용정 비암산 중턱에 정자 모양의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를 이름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 하여 나무에 약을 투여해 고사시켰다는 얘기도 전한다.  

해란강(海蘭江)!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 부근을 돌아 두만강과 만난다. 해란강 일대를 평강평야라 부른다. 일제의 폭정을 피해 한반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이 농사짓고 살았던 사연 깊은 터전이다. 

몇 해 전 연변을 출발하여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거쳐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토문의 두만강을 탐방한 적이 있다. 멀찌감치 창밖으로 바라 봤던 일송정과 해란강이 아직도 두 눈에 선하다. 해란강은 김학철의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의 제목에도 나온다. 일본 식민지 수탈에 시달리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피해를 다룬 소설이다. 작품은 봉건과 반봉건,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라는 대립적 구도로 그려진다.

최근 해란강을 떠올리게 하는 행사가 있었다. 지난 18일 서울 추계예술대 콘서트홀에서 중국 국립연변가무단 내한공연 “해란강의 女灵들, 그 70년의 여정”이 열렸다. 연변가무단은 전래된 민간전통무용과 항일혁명투쟁기의 무용, 북한으로부터 전습된 조선무용과 한국의 전통무용, 그리고 중국 소수민족춤을 레퍼토리로 한 전문예술단체로 명성이 높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 장순향) 초청으로 국내 무대에 서게 됐다. 재중 조선족무용단의 단독공연으로는 국내 최초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공연은 중국 조선족무용 7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프그로램으로 구성되어 관심을 모았다. 1부는 1970~80년대 연변가무단의 대표작이 무대에 올랐다. ‘꽃분이 시집가네’, ‘수양버들’, ‘쌀함박춤’ 등 향토색 짙은 작품들로 민속춤 고유의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2부는 ‘도라지’, ‘인연’, ‘팔선녀’, ‘비상’ 등 2000년대 이후 창작된 작품들로 채워졌다. 우리 정서엔 다소 복고풍으로 여겨졌으나 체계적인 훈련과 풍부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일체감이 돋보이는 율동적 춤사위는 퍽 인상적이었다. 조선민족무용 형식의 전형 창출을 위해 달려온 지난 70여년의 세월이 투영된 특별한 무대였다. 

공연 중간 중간 영상을 통해 연변가무단의 예술적 변화의 시대적 추이를 확인한 것도 의미롭다. 1940년대 야외 광장에서의 공연모습엔 향토색 짙은 투박한 야성(野性)이 물씬 풍겼다. 1960년대 이후 극장무대로 옮겨지면서 화려한 형식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감이 강조되었다. 빛바랜 흑백 영상 속엔 연변가무단의 전설 최옥주의 춤추는 모습도 담겨있다. 중국의 저명한 안무가로 통하는 리승숙의 대표작을 음미한 것도 의외의 소득이다.

연변가무단의 춤메소드 및 작품성향은 한·중 수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2년 한·중 수교 성사 이전에는 주로 북한무용을 수용해 빠르고 역동적이며 테크닉컬한 동작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수교이후 남한의 전통무용과 창작기법을 체득하여 이젠 조선족무용 고유의 어법에서 창조적 전환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립된 체제의 다름과 차이를 포용하려는 열린 의식과 창조적 발상이 신뢰를 더한다. 남북한 무용의 다름과 차이를 넘어 교류와 융합의 관점에서 21세기 조선민족무용의 새로운 전형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연변가무단의 공연은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화두를 던졌다.     

한반도에서 우리 동포들이 중국으로 이주한 시기는 명말청초 약 17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특히 일본 침략이 구체화된 20세기 초 수많은 조선동포들이 북간도로 이주했다.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 사람들이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하여 처음에는 백두산(장백산) 일대에 거주하다가 차츰 반경을 넓혀 동북 3성으로 뻗어나갔다.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 땅에 정착한 조선동포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빈곤층에 속했지만 조선 전래의 민요, 농악, 탈춤 등 민속가무를 일상화했다. 척박한 토양에서 궁핍한 삶을 영위하면서도 조선동포들은 흥과 신명이 넘쳐났다. 민족고유의 춤과 음악은 조선동포들이 낯선 땅에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게다.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은 일제강점기 만주 벌판을 누비며 조선동포들에게 우리 고유의 춤과 가락을 보급했다. 가는 곳 마다 조선동포들이 환호했음은 자명하다. 국악명인의 춤과 음악으로 망국의 한을 달랜 것이다. 한성준과 조선족동포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다가 서로 부등켜 안고 감격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56개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힌다. 무용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조선족무용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중국의 중화권 내 대륙문화의 자양분을 토대로 발전해 왔다.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의 영향도 좌시할 수 없다. 일찍이 주은래 수상의 지원하에 북경희극학원에 최승희무도반을 개설하여 중국의 무용인재 양성에 주력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무용 근대화에 끼친 최승희의 업적은 실로 기념비적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중국에서 조선족무용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 무용사회에서 조선족무용가들의 활동은 단연 돋보인다. 특히 연변가무단은 중국 조선족무용을 대표하는 예술단체로 손색이 없다. 1946년 설립되었으며 화북 태항산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 선전대를 전신으로 한다. 1950년대 초 북경에서 모택동이 연변가무단 공연을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다. 감동한 나머지 즉석에서 여러 민족의 단결을 노래한 시 「浣溪沙和柳亚子先生」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중국 내 조선족무용의 뚜렷한 존재감 내지 높은 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운명적 한계를 딛고 일평생 조선족무용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에 조득현, 박용원, 최옥주, 리승숙 등이 있다. 

우선 중국 조선족무용 제1세대를 대표하는 조득현은 조선족무용의 전문화 및 예술적 체계화에 기여한 선구자로 통한다. 평양 출신으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조득현은 1930년대 후반 하얼빈에서 우스카야와 이제우스키 문하에서 발레를 배워 무용가로 일가를 이뤘다. 그는 조선족 무극(舞劇)의 창시자로 알려진다. 또 1960년대 중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조선족무용의 명맥을 잇고자 노력하는 등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연변 조선족무용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조선족무용의 대모 박용원이다. 그는 1950년대 북경희극학원에 개설된 최승희무도반 출신이며 평양 유학을 다녀온 인물로 최승희의 직계제자다. 스승 최승희의 「립춤기본」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여 독창적 매소드로 완성했다. 조선족 무용인재 양성의 요람인 연변대학교 무용과 창설의 산파역으로 알려져 있다. 일평생 조선족 무용교육에 전념하는 등 후속세대를 길러낸 공로가 크다. 

조득현과 박용원이 조선족무용의 선구자로서 교육과 창작, 이론적 체계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면 연변가무단의 최옥주는 안무가 또는 전문무용수로 명성이 있었다. 최승희를 사사하고 북경무용학원을 수학한 최옥주는 민족무용극 ‘춘향전’을 통해 연변가무단의 본격적인 무극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밖에 중국 국가1급 안무가를 지낸 리승숙이 있다. 그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과의 무용교류에 있어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리승숙 안무의 ‘장백의 정’은 최옥주의 ‘춘향전’에 뒤이은 민족무용대서사시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장백의 정’은 중국의 가장 권위있는 무용콩쿠르로 알려진 련꽃컵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조선족무용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린 걸작이라할 수 있다.   

‘장백의 정’에서 주역을 맡아 련꽃컵대회에서 우수표현상을 거머쥔 함순녀는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을 맡고 있다. 연변예술학원을 거쳐 인민해방군예술학교와 상해무용학원에서 수학하는 등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연변가무단의 핵심리더인 그에겐 ‘민족예술의 한 떨기 꽃’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중국 조선족무용 제3세대의 주역으로 손꼽힌다. 또 중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등 예사롭지 않은 지위에 있다.    

지난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중국 조선족무용계의 지도자를 초청하여 “한민족 춤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학술행사를 가진 바 있다. 이번 한국민족춤협회 초청으로 연변가무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온 함순녀 부단장, 연변대학교 한룡길 교수와 몇 년만에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더없이 반가웠다. 

보통 공연이 끝난 무대는 썰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연변가무단 공연의 경우, 막이 내린 후 더욱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우리”를 선창하면, 뒤이어 모두가 “하나”를 외쳤다. 국내 관객과 재한 조선족동포들이 뒤엉켜 하나가 되었다. 감동적이었다.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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