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춤은 곧 나의 명예이자 인생”
[Culture Interview]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춤은 곧 나의 명예이자 인생”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조두림 기자
  • 승인 2019.12.3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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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용’ 전수조교라는 것은 없어
문화재 불공정 심사 경종 울리는 법고(法鼓)
'승무' 1989년 이수, 2005년 전수교육조교 인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뒤죽박죽 꽁꽁 묶여버린 실타래가 눈앞에 놓여있다고 가정하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심히 곤혹스럽다. 혹자는 ‘뭣 하러 이걸 푸나. 어차피 이렇게 돼버린 것 엉켜버린 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라며 손을 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혹자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고민하며 하나씩 그 과정을 밟아간다. 후자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종국에는 제대로 된 순서로 잘 정리된 실타래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실타래를 풀어야 할 책임의 당사자가 정작 전자였다면 어떤가. 전자는 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그것은 ‘무책임’으로 설명된다. 

지난 4년간 지속된 불공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15일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가 무용 종목 보유자 인정을 의결했다. 이로써 종목별로 승무 19년, 태평무 31년, 살풀이춤 29년 만에 새 보유자가 지정됐다. 특히 이례적으로 복수의 보유자가 지정돼 태평무(제92호)에서만 4명, 살풀이춤(제97호)에서 3명이 문화재가 됐다. 그런데 유일하게 승무(제27호)에서만 한 명의 보유자가 지정됐다. 그것도 기존의 ‘보유자-전수교육조교-이수자’의 전승체계를 깨고 전수조교가 아닌 이수자가 문화재가 되면서,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사 기준과 원칙은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다. 

물론 전승체계 밖에 있는 일반 전승자들도 응시할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진행된 심사였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결과 같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타 종목들에서 복수 지정도 불사한 판국에 1989년 이수, 2005년 전수조교 인정과 더불어 우리 춤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사재를 털어 전 세계에 11개 전수소를 운영, 각종 공연을 통해 승무의 보급과 전승활동에 전념해왔으며 춤과 여러 부분에서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후보자가 탈락한 경우, 무형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는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화재위원회가 ‘비공개’로 일관하며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한다면 위원회 의결의 타당성은 시간이 갈수록 의심될 수밖에 없다. 무형문화재위원회라는 권위 있는 기구가 ‘전문성’을 가지고 내놓은 결과니 그러려니 하기에는 뒷말도 무성하다. 

하지만 보유자 지정을 떠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인격과 명예에 흠집을 낸 점이다.

▲김묘선 씨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문화재 위원들의 부당한 심사에 항의해 끝까지 투쟁을 하겠다”고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지난 9월 1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가 승무를 추고 “문화재 위원들의 부당한 심사에 항의해 끝까지 투쟁을 하겠다”고 입장문을 발표했다

“누군가 4년 전 감사원에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이 일본에 머물면서 제대로 활동하지 않고 있다고 거짓 투서를 냈다.  이후 문화재청은 이 일로 감사를 받았고, 감사원은 문화재청이 관리를 소홀히하고 있다고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그리고 한 지역 매체에서 이 내용이 기사화됐다. 나는 당시 문화재청에 문화재후보 신청을 위해 이미 10년간 활동 자료 등을 제출한 상태였다. 문화재청 담당직원은 허위사실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투서 내용이 반영된 자료를 토대로 보유자 심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는 남편과 자식의 국적까지 논란이 됐다. 남편은 일본인이지만 1996년 인천 부평구청장에게 명예외교관으로 위촉됐고, 2002년 한일문화교류에 힘쓴 공로로 노태섭 당시 문화재청장에게 감사패까지 받았다. 아들 역시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일본인으로 한일문화교류의 민간 외교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따라 귀화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국적임에도 일본국적이라는 잘못된 소문부터, 잘못된 기록까지 사실로 둔갑했고, 잘못된 정보는 무용계와 SNS 등 인터넷상에서 확대 재생산됐다”

엉킬 대로 엉켜버린 오해, 착오, 허위투서는 한 개인의 억울함을 불러일으켰고, 승무 전수조교 김묘선 씨는 억울함에 대한 호소로 지난 9월부터 10월까지 세 차례 청와대 앞에서 승무 시위를 벌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보유자에 떨어져서 저런다’는 등 핀잔했지만, ‘김묘선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겠다고 나섰다.

50여 년 꿋꿋이 춤 인생을 걸어온 결과가 책임기관의 무책임과 세간의 오해, 누명, 루머일 경우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해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최후 방법은 소송이다. 현재 무형문화재위원회를 소관하는 문화재청을 상대로 법적대응을 준비 중이다. 그날 따라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던 한 해의 끝자락이었다. 춤에 대한 진정성을 강조한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를 종로구 한 전통찻집에서 만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2005년 승무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됐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

이매방 선생님께서 1987년도에 문화재가 되시고 나는 1989년도에 선생님께 이수를 했다. 이수를 굉장히 빠르게 한 편이고, 선생님 춤은 다 배웠다. 이후 2005년 전수조교가 됐다. 이매방 선생님께 복수 추천을 받아서 심사위원이신 원로 무용가 선생님들 앞에서 춤을 췄다. 당시 선생님께서 직접 장단을 다 쳐주셨다. 이후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의결로 전수조교가 됐다. 

지난 몇 년간 불공정 심사 등 무용계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은 지난 9월 보유자 인정예고를 강행했다. 특히 타 종목에서 이례적으로 복수의 보유자가 인정됐지만 승무는 단독으로 이수자가 지정됐다. 전수교육조교는 ‘준(準) 문화재’로 불리며, 인간문화재 후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기 때문에 보유자 심사에서 탈락했을 때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

상실감과 절망감이 커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춤을 못 추겠다. 가르치는 건 할 수 있는데 무대에서 춤을 추려니까 되게 창피하더라. 자존심이 상했다. 또 사람들이 저 사람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전수조교인데도 보유자가 안됐나 수군거릴까 속상하기도 했다. 수치스러웠다.

이매방 선생님께도 인정받았고 50년 넘게 명무로 거듭나기 위해 춤에 헌신해왔다. 이매방 선생님께서는 2004년 영상 인터뷰를 통해 “(김묘선은) 내 춤을 변형, 변질을 안 시키고 일본 가서도 우리 춤을 버리지 않고 많이 보급시켰다. 딴 제자들은 나한테 이수 딱 받으면 그날로 굿바이다. 그래서 그런 점에 비교해서 내가 또 묘선이를 마음속으로 이뻐한다. 그리고 본인 자신이 또 춤을 떠나서는 못 살 그런 성격의 소유자다”라고 말씀하셨다. 

납득할 만한 결격사유가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4년 전 보유자 심사에서 춤을 못 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해외 11개 전수소 운영, 수많은 공연들 등 후보들 중 전승활동에는 독보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수가 이해할 수 없이 낮았다. 특히 지금 문화재위원들이 직접 내 춤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나는 춤을 허투루 춰오지 않았다. 나의 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명예회복을 해야 되겠구나 싶더라.

▲지난 9월 19일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의 1차 승무시위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렸다
▲지난 9월 19일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의 1차 승무시위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렸다

지난 9월 1차 청와대 앞 승무 시위 당시 현장 취재를 갔었다. 비장함이 느껴져서인지 춤을 보는 순간 전율이 일더라

고맙다. 어디서 춤 못 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웃음)

위에서 고 이매방 선생이 살아생전 ‘김묘선은 내 춤의 원형을 변질시키지 않았다’라고 했다는데 어떤 점에서인지

대삼소삼 호흡. 모든 춤에는 정중동이라고 그러는데, 대삼소삼 호흡이 제일 중요하다. 들숨, 날숨의 긴 호흡이 있는데 그 대삼소삼 호흡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원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더군다나 호흡이 없다면 전혀 이매방류 춤이 아니다. 무형문화재위원들도 그런 원형을 따져서 심사했을지 궁금하다. 

‘해외용’ 전수조교라는 루머가 있다. 전수조교가 국내용과 해외용이 따로 있나

해외용 전수조교라는 것은 없다. 무형문화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특정 집단을 중심으로 내가 그렇게 불리고 있더라. 억울한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매방 선생님 생전에 정식으로 공식 절차를 밟아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에서 인정한 전수조교가 됐다. 

내 페이스북 계정에도 이미 몇 차례 언급했듯이 나의 국적은 한국이다. 여권도 공개했다. 일본 국적이었으면 문화재 후보에 오르지도 못한다. 1996년 일본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귀화하지 않았다. 아픈 개인사지만, 나는 엄밀히 말하면 남편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거녀, 아들의 생모 정도로 호적에 올라있다. 당연히 부인으로서 권리 등 여러 부분에 제한과 제약이 있다.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고, 남편 성을 따르지 않았다. ‘오구리 묘선’이 아닌 ‘김묘선’으로 남았다. 

NHK 등 일본에서 수십 차례 매스컴을 탔고, 일본에서 승무 보급에 힘쓴 것은 맞다. 하지만 일본뿐만 아니라 승무의 세계화, 우리 춤의 세계화를 위해서 미국 LA 워싱턴 뉴저지 휴스턴, 일본 도쿠시마 오카야마, 브라질 상파울루, 한국 등 세계 11개 곳에서 승무전수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 UCLA 한국 음악과 내 설치된 무용 과목 교환교수로 5년간 현지 대학생들을 가르쳤다. 

우리 문화재의 보급을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각국에서 노력했는데 교묘하게 일본에서만 활동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리고 해외용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게 참 역설적이다. 우리 춤을 인류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들도 있고, 나는 우리 춤의 세계화를 30년 전부터 외치며 노력해왔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이 ‘해외용’ 전수조교라며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활동이 됐다.

▲2018년 2월 미국 메릴랜드 주(State of Maryland) 의회 의사당에서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가 공연하고 있다
▲2018년 2월 미국 메릴랜드 주(State of Maryland) 의회 의사당에서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씨가 공연하고 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이 있었다는데 

4년 전에 누군가가 감사원에 투서를 넣었다. 내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어서 전승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이다. 그래서 감사원이 문화재청 감사를 했고, 문화재청이 전수교육조교 관리를 소홀하게 하고 있다고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이후 한 지역 매체가 그 내용을 바로 기사화했다. 이내 그 기사가 무용계에 돌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런 상황이 되자 문화재청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화됐다는 말은 빼고 이 부분에 대한 의견서를 써달라고 했다. 그게 9월 달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2달 전인 7월에 문화재신청서류를 넣어서 내 10년 동안 활동자료가 문화재청에 다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이미 다 제출했는데 말이다. 확인만 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다시 자료를 정리해서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이후 문화재청이 감사원에 자료를 보내서 그 기록을 지웠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했다. 얼마 전 변호사를 통해 확인해본 결과 김묘선은 일본에서만 오래 머물면서 전승활동을 안 하는 사람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기록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게 문화재청의 직무유기다.

나는 당시나 현재나 한국을 빈번히 오가고 있고, 해외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억울해서 아니라고 SNS 등을 통해 말해보기도 하고 호소했지만, 관계기관의 공식적인 사과도 없었고 누구도 내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그냥 또 시작이네 이런 반응들로 마음이 어려웠다. 무형문화재위원회는 그 잘못된 자료를 토대로 나를 심사했을 것이다. 

승무는 원래 승려와 관련된 춤이다. 2007년 남편이었던 오구리 스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별세한 후 2007년 불가에 입문해 2009년 4월부터 일본 시코쿠(四國) 지역의 유명 사찰 '대일사'의 주지로 있는데, 승려로서 승무를 춘다는 것은 다른 무용가가 느끼지 못하는 심오한 깊이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매방 선생님이 “나는 승려가 되어서 춤은 춰보지 않았지만 너는 승려가 되어서 춤을 추니 내가 모르는 그 세계가 또 있겠구나”라고 내 주지 취임식 날 오셔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시는데 엉엉 울었다.

대일사는 일반 사찰이 아니고 1200년 된 일본의 고찰이다. 그래서 스페인의 산티아고처럼 순례를 하는 순례자들이 전 세계에서 오는 굉장히 유명한 절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왔을 때 나 혹은 제자가 공연을 한다. 공연을 본 일본 사람들은 연구실이나 주차장에서 마주칠 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소노마이(승무)”라고 부른다. 우스갯소리로 승무 교주라고도 한다.(웃음) 그만큼 일본 사람들에게 승려로서 내가 승무로 인식돼 있고, NHK를 비롯해서 30여 개의 민간방송에서도 촬영을 하러 왔었다. 

오사카문화원을 비롯해 일본 전수소에는 한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 일본인들이 승무로 뉴욕까지 가서 국제대회로 열리는 한국콩쿠르대회 대상을 받았다. 승무를 잘 춰서 오죽하면 일본인이 맞는지 확인한다고 여권까지 가지고 오라고 했다.(웃음)

사찰의 주지로, 절 관리도 해야 하고 전수를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두 가지를 병행하기가 많이 어렵지 않은가

아들이 승려 자격을 받고 돌아와서 명의는 아들에게 다 넘긴 상태다. 지금은 아들이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여름‧겨울방학 합쳐서 5~6개월은 일본에 와있고 1년 후에 졸업을 한다. 주지가 되는 신청 기간까지 합하면 1년 반 정도 후에 아들이 주지가 된다. 그래서 현재는 내 스승님이신 부주지 스님이 사찰에서 생활하시면서 관리를 하고 계신다.

그러면 나는 한국에서 지내려고 집도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을 처분 안 했다. 인천 주민이다.(웃음) 그래서 사찰 일에는 거의 손을 다 놓은 상태고 이제 아들이 단에 올라가기 때문에 신정 법회 준비를 도운 후에 1월 한국에 오면 1월부터 한국에서 지내면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김묘선 씨의 세계 11번째 승무전수소인 '김묘선브라질전수소'에서 지난 2월 연수회가 열렸다. 브라질전수소는 지난해 12월 4일 현판식을 개최하고 개소했다(사진=브라질좋은아침뉴스)

전 세계에 전수소 11개를 운영하고 있다. 사재를 털어 운영하고 있다는데

미국에 4개를 비롯해서 ‘우리 춤의 세계화’를 기치로 정말 최선을 다해 사재를 털어 운영해왔다. 학생들도 많이 왔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고 하나씩 정리에 들어갈 것 같다.

솔직히 문화재가 됐다면 명예가 있기 때문에 더 힘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일이 이렇게 돼버린 형국에서 경제적 부담도 있고 자존감도 떨어져서 문을 닫을 예정이다. 내가 도저히 여력이 없다. 차라리 문화재가 없고 전수조교로 남았다면 창피하지라도 않았겠지만, 춤으로 인정을 못 받은 상황에서 면목이 없다.

국가가 예산으로 전수소를 내는 것까지는 못해도 개인적으로 돈 들여서 만들어 놓은 것도 문을 닫게 하는 판국이다. 활동 자료들을 다 제출했는데 무형문화재위원들이 이런 부분까지 생각했을지는 미지수다.

전수조교로서 역할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국내에 제자들이 엄청 많다. 대학교수도 있고 지금 한국 춤의 큰 획을 긋고 있는 제자들도 많이 있어서 보람 있다. 

그런데 앞으로의 목표는 승무를 전공자들만이 추는 춤이 아니라 ‘대중화’시킬 생각이다. 대중화를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10대-20대 승무가 있어야 되고, 30대-40대 승무가 있어야 되고, 50대-60대 승무가 있어야 한다. 또한 ‘주부반’의 취미로 하는 승무가 있어야 한다. 승무는 호흡을 길게 하면서 대삼소삼으로 하는 춤이기 때문에 요가보다 몸 건강에 더 좋다. 그래서 지금 인천 주부반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부반 수강생이 엄청 많다. 오늘 KBS에서도 취재를 왔었는데, 그만큼 대중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언제까지 전공자만 추는 승무는 아니다. 승무를 누구도 출 수 있고, 누구나 가깝게 할 수 있는 춤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대중화시키려 한다. 그리고 나아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다. 그게 진정한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문화재청에게 개인적 감정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춤과 명예회복을 위해 소송은 불사하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 단순한 소송이 아니라 규모 있게 진행할 예정이다.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여력이 안 되기 때문에 전 세계 11개 전수소 운영은 조금씩 정리할 것 같다. 

공연은 정초 일본에서 공연하고, 1월에 한국에서 강습 및 공연, 2월 8일 한국에서 공연 끝나면 9일부터 미국에 간다. 그래서 미국 서부에서 동부까지 쫙 돌면서 공연할 예정이다. 그거는 지금까지 해왔던 도리고, 문화재가 안됐다고 해서 의무를 져버리지는 않는다. 

춤은 곧 나의 명예이자 인생이다. 사실 승무는 나이가 들수록 추기 힘든 춤이지만, 몸이 허락하는 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영예롭게 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