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베토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소나타들[1]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베토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소나타들[1]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01.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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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고향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

베토벤은 22살 때 빈(Wien)으로 온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한 번도 고향 본(Bonn)을 방문하지 못했다. 50살 무렵부터는 고향에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 묘를 찾아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801년 고향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낀 그 곳은 내 눈앞에 언제나 아름답고 또렷하게 보인다. 내가 그 곳을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1804년 완성한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3악장 론도 알레그레토 모데라토(조금 빠르게)에 이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 (피아노 다니엘 바렌보임, 3악장은 15:47부터)
https://youtu.be/J3l18HTo5rY

오른손이 연주하는 분산화음은 햇살에 반짝이는 라인강의 물결이다. 왼손이 노래하는 멜로디는 어릴 적 들은 라인 지방의 민요다. 강물과 노래는 한데 어울려 용솟음치기도 하고, 나지막히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아련히 흘러간다. 어린 베토벤은 개구쟁이였다. 집주인 피셔씨의 닭장에서 계란 서리하다가 들켰을 때 능청스레 둘러댄 기록이 있다. 베토벤과 두 동생은 만취한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서 집에 돌아온 적도 있고, 야경꾼한테 아버지가 잡혀갈 뻔 했을 때는 결사적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어린 베토벤은 아버지에게 혼나서 우울할 때면 다락방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멀리 라인강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머니…. 베토벤은 어머니를 언제나 “열렬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회상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정직하고 선량한 여성”, “정말 훌륭하고 친절한 어머니이자 최고의 친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머니는 1787년, 아들이 17살 때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다. 이 무렵 베토벤은 아우구스부르크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아아! 어머니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아직 부를 수 있고 그 부름에 대답해 줄 사람이 있던 때보다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제 누구에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메이너드 솔로몬 <루트비히 판 베토벤> 1권 p.87~88)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3악장은 따뜻하고 정다운 베토벤의 마음을 담고 있다. 어머니와 라인강에 대한 그리움이자, 고향의 후원자인 발트슈타인 백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이 곡을 헌정한 발트슈타인 백작(1762~1823)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잘 친 독일의 귀족으로, 1788년 본에서 일하게 된 뒤 베토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젊은 베토벤을 하이든에게 소개한 사람도, 베토벤의 빈 데뷔를 지원한 사람도 그였다. 1792년 고향을 떠나는 베토벤을 그는 이렇게 격려했다. “사랑하는 베토벤, 이제 빈으로 가서 오랜 꿈을 실현하게. 빈은 아직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 흘리고 있네. 모차르트의 창조적 정신을 아쉬워 하며 아직도 슬퍼하고 있네. 천재의 영혼은 하이든에게 피난처를 구하고 있지만 아직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있네. 자네는 쉼없는 노력으로 하이든에게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아야 해.” - 1792년 베토벤의 ‘우정수첩’에 발트슈타인이 쓴 메모
 
본(Bonn) 시절부터 베토벤을 후원하고 격려한 발트슈타인 백작

베토벤은 백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빈 음악계의 왕자가 됐다. 이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단순히 ‘하이든에게서 받은 모차르트의 정신’이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베토벤의 정신’으로 빛난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무렵 백작은 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베토벤이 이 곡을 그에게 바친 것은, 그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트슈타인 백작의 이름은 이 걸작 덕분에 영원히 인류사에 남게 됐다. 

이 소나타는 과거의 어떤 소나타보다 규모가 크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장대하고 화려한 음향을 들려준다. 피아노라는 악기와 연주자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확장한 이 작품을 비평가 빌헬름 폰 렌츠는 ‘피아노를 위한 에로이카 교향곡’이라고 불렀다. 첫 악장부터 들어보자.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생기있게), 첫 주제는 성숙한 베토벤답게 당당하고 씩씩하다.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해야만 제 맛이 날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서서히 하강하는 선율로, 경건한 감사의 기도처럼 마음을 적신다. 2악장 아다지오 몰토(아주 느리게)는 3악장을 열어 주는 서주에 해당된다. 베토벤은 원래 느린 악장으로 아름다운 안단테를 썼지만, 곡 전체가 너무 길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 부분을 ‘안단테 파보리’(인기있는 안단테)라는 별명으로 따로 출판하고 지금의 2악장을 새로 썼다.

루돌프 대공과의 우정

1809년 5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빈(Wien)을 폭격하고 유린했다.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황제 프란츠의 동생)은 급히 피신해야 했다. 베토벤은 이미 나폴레옹에 대한 환상을 접은 지 오래였다. 혁명의 꿈은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전쟁은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뿐이었다. 베토벤에게는 전쟁보다 사랑하는 친구와의 우정이 더 중요했다. 

<고별>(Les Adieux) 소나타는 빈을 떠나야 하는 루돌프 대공과의 작별을 안타까워하며 작곡했다. 베토벤은 악보의 표지에 ‘1809년 5월 4일 빈에서, 존경하는 루돌프 대공의 떠남에 즈음하여’라고 쓰고 악장마다 직접 부제를 붙여서 작별의 아픔과 재회의 희망을 담았다. 베토벤이 음악에 표제를 붙인 것은 <전원> 교향곡 이후 이 곡이 처음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Eb장조 ‘고별’ (피아노 마우리치오 폴리니)
https://youtu.be/7FOZ4_nv5g4

1악장 첫 부분, 세 개의 하강하는 음표 위에 베토벤은 ‘안녕’(Lebewohl)이라고 써 넣었다. 서주는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나지막히 노래한다. 이 작별의 동기는 1악장 전체에 되풀이 나타난다. 힘찬 알레그로 부분에서는 베토벤의 정다운 마음이 한껏 펼쳐진다. 2악장은 ‘부재’(Abwesenheit)다. 루돌프 대공이 떠난 뒤의 허전한 마음을 예상하며 작곡했다. 42마디로 된 짧은 악장인데, 악상이 고르지 않아서 불안한 느낌이다. 루돌프 대공이 떠난 뒤 빈(Wien)은 프랑스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됐다. 그 포성 속에서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고, 베토벤과 애틋한 마음을 나눈 에르되디(Erdödy) 부인의 집이 파괴됐다. 2악장이 무척 짧은 것은 헤어짐의 나날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란 베토벤의 마음 같다. 3악장의 부제는 ‘재회’(Das Wiedersehen), ‘매우 빠르고 활기있게’라고 돼 있다. 기뻐서 환호하듯 울려 퍼지는 팡파레에 이어, 밝고 투명한 빛이 현란하게 교차하며 가슴 벅찬 재회를 찬미한다.

베토벤이 이 곡을 바친 루돌프 대공(1788~1831)은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아들로 1809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그는 음악성이 아주 뛰어났다. 프랑스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로드와 함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을 초연한 뒤 호평을 받은 기록이 있다. “피아노 파트가 바이올린보다 훨씬 훌륭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정신을 더 잘 소화해 더욱 풍부한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의 집에 드나들 때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이를 알게 된 대공은 베토벤의 자유로운 출입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인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2020년은 악성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리는 해입니다. 베토벤은 청각상실의 비극을 위대한 음악으로 승화시켰을 뿐 아니라 자유, 평등, 형제애를 역설한 근대 시민민주주의의 아들입니다. 그의 음악은 2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용기와 위안을 줍니다. 이에 필자는 베토벤 음악 세계를 집중 탐구한 내용을 수차례에 걸쳐 연재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