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0원의 미학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0원의 미학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1.1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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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 연말, 한 국제 퍼포먼스 페스티벌의 학술 디렉터 자격으로 내몽고에 다녀왔다. 올해로 일곱 번 째를 맞이하는 [열설(Burnt of Snow)]이란 축제인데, 이 행사는 영하 20도를 웃도는 추위속에서 퍼포먼스를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년에도 초대를 받았지만, 연말에 캐나다의 퀘백과 중국의 충칭, 그리고 제주도에서 잇달아 열린 국제미술행사에 참석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탓에 갈 수가 없었다.

벼르고 간 내몽고는 과연 호연지기를 기르기에는 안성마춤의 고장이었다. 내몽고자치주의 주도인 호화호특(Hohhot) 시는 어지간한 나라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대했으며, 거리는 수많은 차량들과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중국어인 한자와 몽골어를 병기한 붉은 색 간판을 단 고층건물들은 오늘날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던 스타일의 기능주의의 양식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국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미국, 핀랜드. 세르비아, 스페인, 체코, 이태리 등 유럽지역과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인도, 한국, 일본 등 15개국에서 모인 약 30 여 명의 참가자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때 마다 각자 구상하고 준비해 온 퍼포먼스 작업을 발표하였다. 퍼포먼스 자체가 일정한 틀과 양식을 거부하는 예술의 매체이다 보니 특정한 공간과 일상공간의 구분이 없이 시시때때로 전개되었다.

▲내몽고 지역 퍼포먼스 페스티벌 열설(Burnt of Snow)진행 모습(사진=윤진섭)

이야기가 잠시 벗어나지만 사실 퍼포먼스만큼 예술의 제반 형식에서 자유로운 매체도 없다. 예술의 한 장르이기를 거부하는 그것은 삶이 곧 퍼포먼스라고 할 만큼 인간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것은 기존의 대부분의 조형예술과 공연예술의 숱한 장르들이 삶이나 대상에 대한 모방 혹은 내면적 표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데 반해, 예술을 삶과 일상 그 자체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 왔다. 전위의 첨병이자 예술실험의 극한투쟁가, 새로운 예술영역의 개척자로서의 행위예술가들은 대부분 경제적 빈한과 무명으로 인한 사회적  소외라고 하는 악천후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예술을 꽃피워 오고 있는 것이다. 오직 개인적 취향과 예술가적 기질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들의 활동을 감쌀 수 있는 말은 ''좋아서 한다''는 것 밖에 없다.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영하 20도, 체감온도 30도의 혹독한 날씨 속에서 옷을 벗는 과정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행하다 감기가 들어 1주일 간의 행사기간 내내 고생한 엔트리 사만트리(인도네시아)의 행위를 설명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2019년 12월 31일 오후, 약 30 여 명에 이르는 일행은 호화호특 시에서 버스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눈 덮힌 초원에 도착했다. 중국의 전통인 듯 싶은, 커다란 생 돼지고기를 중간에 매단 굵직한 동아줄을 사이에 두고 외국인팀과 중국인팀 간의 줄다리기 친선 시합이 끝나자, 프로그램에 따라 각자 퍼포먼스를 행하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해가 뉘엇뉘엇 질 때까지 설원에서 퍼포먼스를 즐겼는데, 그 중에서 압권은 체코에서 온 토머스 룰러의 행위였다.

플럭서스 이후 첨단의 전위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블랙 마켓의 멤버이기 한 그의 행위는 유심히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것이었다. 검정색 털모자에 검정 일색의 복장을 한 그가 철망을 넘어 설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내몽고 지역 퍼포먼스 페스티벌 열설(Burnt of Snow) 진행 모습(사진=윤진섭)

그는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무심히 울타리를 넘더니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갔다. 토머스는 그렇게 1킬로미터쯤 되는 언덕을 향해 걸어갔고, 마침내 그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변했을 때쯤이 돼서야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그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행위는 약 30분 동안 흰 눈이 쌓인 언덕을 걸어간, 어찌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 행위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가 언덕을 넘어가자 눈 쌓인 설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는데, 분명한 것은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온 도시 전체가 빛에 휩싸인 스펙타클의 사회(기 디보르)에서 한 개인이 보여준 이 최소한의 행위가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점차 물량화돼가는, 그리하여 전체주의화돼 가는 신흥 제국주의의 집단화 현상에 대한 개인의 저항일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미니멀한 형태인 걷는 행위를 통해, 그리고 금욕을 상징하는 검정색 복장을 통해 인간의 절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적이며 상징적 행위를 통해 지배적인 사회현상에 대해 촌평을 가하는 것은 퍼포먼스 특유의 경제적인 표현술 가운데 하나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조명이나 분장, 특수 효과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을 넘어 사라진 토머스의 모습은 말 할 수 없이 깊은 여운을 우리에게 준다. 비록 수십 분 후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 사이의 시간에 꿈꿀 수 있는 '0원의 미학'을 우리에게 선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