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베토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소나타들[2]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베토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소나타들[2]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02.1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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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1808년 베스트팔리아 궁정이 베토벤을 초청하자, 루돌프 대공은 빈의 귀족들을 규합하여 베토벤을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베토벤이 빈을 떠날 것을 우려하여 연금을 지급해서 잡아두려 한 것이다. 그는 “생계의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위대하고 숭고한 작품을 창조하며 오직 그 분야에 헌신할 수 있다”고 썼다.

두 사람은 단순히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를 넘어 마음 속 깊이 우정을 나눴다. 베토벤은 1812년, ‘불멸의 연인’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했다. 이 무렵의 심경을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일요일 이후 나는 많이 아팠습니다. 물론 그 병은 신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차례차례 일어나서 저는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렸습니다.” 베토벤이 사랑의 아픔 속에서 홀로서려고 안간힘을 쓸 때 정신적 힘이 돼 준 사람이 루돌프 대공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고별> 소나타 뿐 아니라 피아노 트리오 <대공>, 피아노협주곡 <황제>,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장엄미사> 등 중요한 작품 11곡을 헌정해서 감사를 표했다.
 
삶에 감사하는 마지막 소나타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의 영혼, 그 편력의 기록이었다. 50살을 넘긴 베토벤은 <함머클라비어>에서 피아노 소나타가 이를 수 있는 극한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미지의 영역을 세계를 동경하는 그의 뮤즈는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더 낳게 했다. E장조, Ab장조, C단조의 마지막 세 소나타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예술가의 내면의 고백이다. 치열한 일생을 살아 낸 예술가만 도달할 수 있는 달관, 희열, 평화의 경지다.

보헤미아 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1903~1991), 기나긴 인생길을 굽이쳐 걸어와서 84살이 된 그는 베토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곡들을 연주했다. 늙어서 앙상해진 손가락에서 이토록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나오다니, 놀랍지 않은가. 기력은 젊은이에 비해 떨어지지만, 마음만은 삿됨이 없는 순수 그 자체다. 소나타 31번 Ab장조의 1악장, ‘모데라토 칸타빌레 몰토 에스프레시보’(짙은 표정으로 노래하듯)라고 지정한 악보 첫머리에 베토벤은 ‘따뜻한 마음으로’(Con Amabilita)라고 덧붙였다. 아침이슬처럼 맑은 첫 주제는 영롱한 펼침 화음이다. 이 주제는 때로 고뇌와 우수를 머금으며 다양하게 변화한 뒤 처음의 평정을 되찾으며 마무리한다.

피아노소나타 31번 Ab장조 Op.110 중 1악장 (피아노 루돌프 제르킨, 1987년 연주 실황)
https://youtu.be/V89Z1z9rYqc

베토벤이 52살 되던 1822년 1월 완성한 마지막 소나타인 32번 C단조는 여느 소나타들과 달리 두 개의 악장으로 돼 있다. 1악장 마에스토소(장엄하게)는 그가 운명과 투쟁할 때 사용한 C단조로, 폭풍 같은 고뇌와 팽팽한 긴장이 가득하다. 2악장 ‘아리에타와 변주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소나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다지오 몰토 셈플리체 에 칸타빌레’(아주 느리게, 단순한 마음으로 래하듯), 끝없이 넓은 세계로 날아가는 고귀한 정신으로 긴 인생을 회고한다. 마지막 소나타답게, 모든 고뇌를 초월해서 찾아낸 단순한 아름다움이 빛난다. 9/16박자의 아리에타 주제는 생각에 잠겨 고요히 노래한다. 5개의 변주곡이 이어지며 점점 감정이 고조된다. 후반부로 가면서 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비통한 작별의 마음이 교차한다. 제4변주에서는 안개처럼 뿌연 꿈과 추억을 더듬고, 아득한 내면을 응시한다. 기나 긴 트릴에 실려서 아리에타 선율이 흐른 뒤, 클라이맥스를 너머 피안의 기쁨에 도달하고 차츰 고요해지며 마무리한다.

베토벤 자신이 ‘감사의 노래’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삶에 대한 조건없는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온갖 고통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눈물을 머금고 생애를 되돌아보는 베토벤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맺혀 있다. 감정이 격해져서 목이 메지만, 고요한 눈빛에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다. 비서 신틀러가 이 곡에 피날레가 붙어있지 않은 이유를 묻자 베토벤은 “시간이 없어서 못 썼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 농담이었다. 이미 “안녕, 안녕” 했는데 무슨 피날레가 더 필요할까? 마지막 변주에서 베토벤의 영혼이 요동쳐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더 이상 새 악장을 덧붙일 필요가 없음을 실감케 된다.

피아노 소나타 32번 C단조 Op.111 2악장 아리에타와 변주 (피아노 루돌프 제르킨, 1987년 연주 실황)
http://youtu.be/KsLojxzbuFM

이 연주는 84살 노대가 루돌프 제르킨의 마지막 녹음이다.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주의 테크닉보다는 음악에 담긴 위대한 천재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지막 악장의 클라이맥스, 최고조에 이른 감정은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된다. 오직 음악을 위해 평생 기량을 갈고 닦은 구도자 루돌프 제르킨, 그리고 폭풍 같은 삶을 헤치고 안식의 경지에 도달한 베토벤의 모습이 겹쳐진다. 베토벤에 대한 외경심이 오롯이 담긴 제르킨의 연주, 진정 지혜롭게 늙은 자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의 연주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늙어라, 아름답게 늙어라” 얘기해 주는 것 같다.

이 연주는 84살 노대가 루돌프 제르킨의 마지막 녹음이다.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주의 테크닉보다는 음악에 담긴 위대한 천재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지막 악장의 클라이맥스, 최고조에 이른 감정은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된다. 오직 음악을 위해 평생 기량을 갈고 닦은 구도자 루돌프 제르킨, 그리고 폭풍 같은 삶을 헤치고 안식의 경지에 도달한 베토벤의 모습이 겹쳐진다. 베토벤에 대한 외경심이 오롯이 담긴 제르킨의 연주, 진정 지혜롭게 늙은 자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의 연주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늙어라, 아름답게 늙어라” 얘기해 주는 것 같다.

2020년은 악성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리는 해입니다. 베토벤은 청각상실의 비극을 위대한 음악으로 승화시켰을 뿐 아니라 자유, 평등, 형제애를 역설한 근대 시민민주주의의 아들입니다. 그의 음악은 2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용기와 위안을 줍니다. 이에 필자는 베토벤 음악 세계를 집중 탐구한 내용을 수차례에 걸쳐 연재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