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낙안읍성·해미읍성과 동편제·중고제 판소리문화
[성기숙의 문화읽기] 낙안읍성·해미읍성과 동편제·중고제 판소리문화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2.1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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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전남의 낙안읍성, 전북의 고창읍성 그리고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을 일컫어 한국의 3대 읍성이라 부른다. 읍성은 조선초기 군사적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낙안읍성도 예외가 아니다. 긴 해안을 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낙안지역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15세기 무렵 낙안읍성이 축조되었다.

16,7세기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낙안읍성의 군사적 기능은 한층 중요해졌다. 조선후기 실학의 등장과 함께 생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낙안읍성은 인구가 급증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록에 의하면, 낙안읍성엔 2일, 7일에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다양한 물품교환이 이루어지는 등 상업자본의 맹아적 기운이 싹텄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까지 낙안읍성은 옛 낙안군의 군사적, 행정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불행하게도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지배가 본격화되면서 낙안읍성도 변곡점을 맞는다. 읍성철폐령이 내려지자 낙안읍성은 일본의 행정관청으로 사용되는 등 불운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 1950년 6.25전쟁을 겪으면서 낙안읍성 고유의 기능과 역할은 거의 망실됐다. 다행히 1983년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읍성의 성곽을 비롯 주요 시설이 복원, 정비되어 원형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현재 전통읍성으로서 낙안읍성의 원형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조선시대 고문헌 혹은 고지도에 나타나 있는 낙안읍성의 모습은 의미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약 6종의 고문헌에 낙안읍성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與地圖)」 등 고지도의 기록도 눈여겨 볼 자료다.

낙안읍성은 고문헌 및 고지도에 기록된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방의 읍치를 기반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전통시대 도시의 원형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낙안읍성은 정치, 군사, 행정뿐만 아니라 생활풍습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조선시대 역사문화유산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낙안읍성은 읍성으로서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600여년의 전통민속마을의 경관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전국의 읍성 중에서 유일하게 민가영역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음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낙안읍성에는 100세대, 약 2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 중 사람들이 직접 살고 있는 곳은 낙안읍성이 유일하다. 이는 낙안읍성이 박제화된 역사공간이 아님을 증명한다.

낙안읍성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를 품고 있다.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낙안읍성만의 차별화된 가치를 지속적으로 지켜가는 길은 무엇인가. 우선 읍성으로서의 건축적 관심, 즉 유형자산에 머물지 말고 무형적 자산과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컨대, 낙안읍성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을 제사하는 사당에서 제례의식과 함께 문묘제례악무를 병행하는 것이다. 전통유교건축의 기반위에 축조된 낙안읍성에는 두 개의 사당이 있다.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김빈길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바로 그것이다.

김빈길 장군은 왜구의 침탈로 주민들이 낙안을 떠나자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토성을 쌓고 관아를 세우는 등 낙안읍성 재건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낙안 유림들이 건립한 사당에서는 매년 2월 제례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두 영웅적 인물을 기리는 유교식 제례의식에 기왕이면 문묘제례악무를 곁들인다면 낙안읍성의 유·무형적 가치는 한층 배가될 것이라 여겨진다.

또 하나는 낙안읍성과 판소리문화를 키워드로 한 유·무형의 결합이다. 순천은 판소리 동편제의 시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순천감영에서는 매년 정월 대사습이 열렸다고 전한다. 순천 출신 송만갑은 근대 5명창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동편제 판소리 예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송순섭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순섭 명창은 현재 낙안읍성에 터를 잡고 동편제 판소리 법통을 잇고 있다.   

낙안읍성에 동편제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면,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에는 중고제의 예맥이 흐르고 있다. 중고제는 경기·충청지역에서 전승된 판소리를 일컫는다. 서산은 중고제 판소리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중고제 판소리 명창 중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 등이 서산 출신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심정순가(家)는 5대에 걸쳐 무려 7명의 국악명인을 배출한 국악명문가로 손색이 없다.

낙안읍성은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바 있으나 최종 단계에서 통과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작년 9월 순천에서 낙안포럼·낙안읍성보존회 주최로 낙안읍성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관계 전문가, 행정가 및 지역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낙안읍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추진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세미나에 참여한 필자는 낙안읍성에 내재된 유·무형자산에 대한 동시적 관심 및 한국의 3대 읍성과 연계된 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을 주장했다. 즉 낙안읍성과 동편제, 고창읍성과 서편제, 서산 해미읍성과 중고제 판소리문화와의 결합을 통해 상호 시너지 창출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나아가 해당 지자체간 행정적 공조 및 전략적 제휴와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전통성과 고유성, 역사성 그리고 보편성이 중요한 가치로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한국의 서원’ 9곳, ‘한국의 사찰’ 7곳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 전례가 있다. 이러한 전례를 참고삼아 조선시대 3대 읍성을 한데 패키지로 묶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낙안읍성은 연간 약 100여명의 관광객이 찾는 전통민속마을로 자리 잡았다. 600여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역사적 층위가 낙안읍성의 문화원형적 가치를 웅변하고 있다. 특히 약 2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는 것은 여타의 읍성과 차별화되는 큰 특징이라 하겠다.

이렇듯 낙안읍성이 원형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존속 가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낙안읍성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인 낙안포럼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민간영역에서의 자발적 활동이라서 더욱 뜻 깊다.

낙안포럼은 매년 세미나, 포럼 등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낙안읍성의 문화원형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낙안읍성의 ‘작은 거인’ 송상수 낙안읍성보존회장의 헌신은 실로 눈물겹다. 올해도 민(民)·관(官)의 긴밀한 공조와 협력을 통해 낙안읍성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역사문화마을로 가꾸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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