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몸은 마음의 집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몸은 마음의 집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3.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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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 호에 이어> 나는 지난 1990년 그의 개인전에 즈음하여 장문의 작가론을 쓴 적이 있다. 그의 이전 작업의 궤적과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다소 길지만 참고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 빳빳하게 발기된 생식기, 곰실대는 내장의 보드라운 느낌, 말끔하게 벗겨진 대머리, 짐승의 것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이빨 등은 정복수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인체의 단편들이다.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해 내려진 기존의 평가가 말해 주듯이, 그것들은 대개 섹스라든가 폭력, 또는 야만성 따위와 같은, 인간이 생래적(生來的)으로 지니고 있는 수성(獸性)에 대한 혐오 내지는 고발과 연관지어 설명돼 왔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을 둘러싼 사회학적 또는 심리학적인 접근 방법은 창작의 동기나 작품의 생성 배경, 메시지의 의미라든가 기호, 상징 등을 명쾌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반면, 작품이 지닌 또 다른 측면인 형식이나 기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단점을 안고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해서, 작품분석의 초점을 매체라든가 조형적 특성에 맞춰 가장 순수한 형태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형식주의 비평의 한계와 상반되는 국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다 완전한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과 내용 사이를 오가는 긴밀한 관계들의 체계를 살펴봄으로써, 작품이 지닌 의미를 미술사라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건져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복수,생각의집(2010-2019)(도판=윤진섭 제공)

이러한 서술은 이 글을 쓸 당시만 하더라도 정복수의 작업이 워낙 복합적이기 때문에 한 두 개의 비평적 잣대로는 접근이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정복수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필생의 주제인 ‘인간’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 변형캔버스를 비롯하여 바닥화, 오브제, 그리고 최근의 가면의 도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상의 변주를 꾀해 왔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떤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한 적이 있는 ‘메시지와 미디어’의 양 측면은 정복수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국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곧 실험주의자인 정복수의 다면체적인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도 정복수의 작품세계를 관류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지난 40여년 간 이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 왔다. ‘미와 추’라고 하는 이 고전적인 주제는 현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성형미인이 판을 치는 현 세태를 놓고 볼 때 정복수의 예리한 칼날은 보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겉보기엔 아름다운 미인이지만 뱃속을 들여다보면 더러운 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의 그림은 마치 불경의 한 구절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인체를 냉혹하게 해부하여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 자, 이것이 네 몸이요 살이다. 그러니 보라! 네 몸의 생생한 모습을.”(필자, 정복수-인간의 양면성 <몸의 언어> 중에서 인용)

정복수의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미래의 인간상을 앞당겨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편화된 인체의 단편들은 공해가 극심해진 미래의 어느 날 출현할지도 모을 인간상을 예시한다. 눈이 여럿 달리고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뒤틀린 괴물을 닮은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몰고 올 현대문명의 부작용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 등 기후변화가 가져온 인류의 대재앙은 지금도 전대미문의 갖가지 사건들을 낳고 있지 아니한가? 조류독감(AI)과 아프리카 돼지열병(ASF)을 비롯한 인류의 코앞에 닥친 현안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 수십만 마리의 돼지들을 한꺼번에 살처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다. 도살된 돼지의 피가 강물을 이룬 참혹한 살해의 현장을 뉴스 화면으로 접하면서 인간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인함과 끔찍함에 치를 떨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복수가 이 그림을 그릴 8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끔찍한 장면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예지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정복수,마음의집(2019)(도판=윤진섭 제공)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이론과 미술 경향 가운데 하나인 몸 담론을 일찍이 70년대부터 작품으로 실천해 온 정복수는 이 분야의 선구자이다. 이는 정복수 스스로가 술회하듯이 “서구사조의 아류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모습을 파고들어가고자 했던” 결기로부터 출발했다.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풍자와 탄핵(이는 손의 표정으로 나타난다.)을,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는 ‘밟아주세요’라는 제목의 바닥화를 통해 나타난다.)을 구사하는 다면체적 표현방식은 정복수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다. 인간을 화두로 전개되는 이러한 다원적 방식은 그의 작품의 개념적 전개를 선형적이라고 보다는 마치 감자뿌리처럼 얼기설기 얽힌 리좀적 구조로 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 이유는 형식적 변화와 내용적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작가 자신도 잘 모르는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계기들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데 거기에는 시기적으로 앞선 계기와 뒤에 온 계기들의 구분이 선명치 않은 가운데 시간적으로 뒤엉켜 급진적 융합을 거듭한다. 과거의 표현술이 현재의 것과 섞이는가 하면 소재 역시 그러하다.

그 다음에 살펴봐야 할 것은 정복수 그림에 빈번이 등장하는 눈의 의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서술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몸뚱이 한 가운데를 관류하는 내장에다 좌우로 포진해 있는 수많은 눈들. 그 시선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아마 정복수 만큼 인간의 문제를 파헤치면서 직설적으로 발언을 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눈이 많이 등장한다. 그 눈들은 몸통의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 이 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감시하는 눈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 눈들이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 그림이 평면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 눈들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 눈을 바라보라. 그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눈은 거울과 같지 않은가. 그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쳐보면서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고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법하다.”(필자, 앞의 글에서 인용)

▲정복수,인생의일기(사진필요)(2003-2005)(도판=윤진섭 제공)

이 눈의 의미와 최근에 그가 주력하고 있는 가면의 등장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주목해 보도록 하자. 정면을 향해 뚫어지듯이 바라보는 눈과 이에 대해 가면을 쓰는 것은 곧 시선의 응시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곧 사회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면서(사회 를 산다고 하는 것은 곧 끊임없이 가면을 쓰는 일에 다름 아니다),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진정한 자아와 속마음을 숨기려고 하는 본능적 표현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서두에서 인용한 정복수의 발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몸은 ‘마음의 집’이라고 갈파했다. 그리고 그는 그 화두를 부여안고 40년이 넘는 세월을 작가로 살아왔다. 그는 철저히 인간을 해부했고, 그 실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이 육화된 ‘몸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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