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어떤 곡일까?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어떤 곡일까?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04.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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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1824년 5월 7일 초연된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의 내면에서 평생 숙성해 온 그의 모든 이상을 담고 있었다. 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소진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베토벤의 예술혼은 다시 한 번 저 멀리 피안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무렵, 어느 시인이 자신을 찬양한 시를 읽고 베토벤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 우선 어색한 느낌이 들고, 내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곧 의식하게 된다. 누군가의 칭찬은, 예술과 자연이 내게 부과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더 나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인간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824년 말, 현악사중주곡의 악상이 그의 내면에 잉태돼 있었다. 마침 페테르부르크의 음악애호가인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이 “두세 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써 달라”고 의뢰했다. 베토벤은 이 요청에 기꺼이 응하여 이듬해까지 세 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잇따라 작곡했다. <환희의 송가> 이후 신선의 경지에 이른 그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마지막 사중주곡들이었다. 세 곡의 갈리친 사중주곡인 Eb장조 Op.127, Bb장조 Op.130, A단조 Op.132, 그리고 베토벤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빚어진 C#단조 Op.131과 F장조 Op.135…. 이 5곡의 마지막 사중주곡은 베토벤의 위대한 창작 여정을 마무리하는 최후의 걸작으로, 고전 시대의 틀을 뛰어 넘어 자유분방한 낭만 정신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 가운데 15번 A단조의 3악장 ‘몰토 아다지오’(아주 느리게)는 ‘위장병에서 나은 이가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베토벤은 20대 중반 청각에 이상이 생길 무렵부터 평생 위장병을 앓았다. 약을 먹고 온천욕을 했지만 병은 완치되지 않은 채 30년 넘도록 베토벤을 괴롭혔다. 1824년 이 곡을 작곡할 무렵, 베토벤은 배의 통증이 심해져서 펜을 멈춰야 했다. 베토벤은 삶의 의욕을 거의 상실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배의 통증은 어느덧 사라졌고, 베토벤은 예정에 없던 장대한 ‘감사의 노래’를 작곡했다. 베토벤은 이 아다지오의 악보에 ‘새로운 힘을 다시 느낀다’고 써 넣었다.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한 화음, 고통을 겪어 본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감사의 노래다.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열린 베토벤의 장례식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5번 A단조 3악장,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
https://youtu.be/1vTSpfWbSGs

“내 모토는 항상 이거야. 한 줄도 쓰지 않는 날이 없도록! 때때로 내 뮤즈가 잠들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그녀가 잠이 깰 때 언제나 더 활발해지지 때문이지. 나는 지금도 몇 곡을 더 쓰고 싶어. 그 다음에는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속 어딘가에서 지구 위의 내 여정을 마치고 싶네.”

베토벤은 마지막 현악사중주곡을 모두 쓴 뒤인 1826년 12월 7일, 고향 친구 베겔러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하지만 베토벤의 뮤즈도 이번에는 그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그는 이미 위중한 상태였다. 각혈을 했고, 숨쉬기가 어려웠고, 옆구리 통증 때문에 누워 있기도 고통스러웠다. 12월 20일, 25파운드(약 11Kg)의 복수를 빼냈다. 그러나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입대를 앞둔 조카 카를이 병상을 지키며 시중을 들었다. 카를은 그해, 베토벤의 지나친 집착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났다. 베토벤은 죽음의 병상에 누운 뒤에야 어린 조카와 화해할 수 있었다.

위대한 작곡가의 삶은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3월 24일, 베토벤은 비서 신틀러와 피아니스트 모셀레스 앞에서 말했다. “박수를 쳐라, 친구들이여, 희극은 끝났으니.” 그날 친구 쇼트가 보낸 와인이 도착하자 베토벤은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어!” 혼수상태에 빠진 베토벤은 3월 26일, 천둥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늦은 오후, 잠깐 눈을 뜨고 오른팔을 치켜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을 다시 내려놓는 순간 그의 숨은 멎고 말았다.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다투었던 제수 요한나 라이스였다. 베토벤은 그녀를 증오하여 ‘밤의 여왕’이라고 불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열린 베토벤의 장례식

베토벤이 임종한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의 방에는 그가 평생 존경한 할아버지 루트비히 베토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머리맡에는 하이든의 출생지 로라우 풍경을 담은 석판화가 놓여 있었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 하이든에게 반항하여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마지막 나날, “이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작은 집”을 보며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의 유물에는 대화수첩 4묶음, 자필 악보와 편지들, 안경과 보청기, 상아에 새긴 줄리에타 기차르티와 안토니 브렌타노 - 메너드 솔로몬이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한 여성 - 의 초상,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와 1812년 ‘불멸의 연인’에게 쓴 세 통의 편지가 포함돼 있었다. 3월 29일,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1만명이 넘는 인파가 빈 중심가를 메웠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조사가 낭송됐고, 빈의 음악가들이 횃불을 들고 운구 행렬을 따랐다. 이 행렬 속에는 다음해에 세상을 떠날 슈베르트도 걷고 있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현악사중주곡 16번 F장조 Op.135다. 1826년 가을, 베토벤은 자살 미수로 머리를 다친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별장에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 이 사중주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네 악장으로 돼 있고 연주시간도 제일 짧다. 기분 좋은 농담 같은 1악장 알레그레토, 미소를 머금은 듯한 2악장 스케르초…. 이어서 ‘충분히 느리게, 노래하듯 고요하게’라고 돼 있는 3악장은 달빛처럼 청초한 느낌으로 지난 삶을 돌이켜 보는 듯하다.

4악장의 앞머리에 그는 ‘힘들게 내린 결심’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첫 부분, ‘그라베’(grave)라고 표시된 엄숙한 서주의 악보에 베토벤은 써 넣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Muss es sein?)” 이어지는 알레그로(allegro)는 밝고 명랑하게 장난치는 듯한 느낌인데, 이 대목에는 이렇게 써 넣었다. “그래야만 했어! (Es muss sein)” 베토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듯하다. 이 작품의 유머는 인간이 살아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처럼 보인다. 이미 지나간 비극을 되새기며 상심하는 것은 필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현재를 망치는 것도 어리석다. 오직 현재에 살고 기뻐하면 된다. 평생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기 위해 투쟁해 온 베토벤은 이 마지막 작품에서 순진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현악사중주곡 16번 F장조 Op.135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https://youtu.be/tSvPl0PBRvo

▲베토벤의 데드마스크

베토벤의 데드마스크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 16번 현악사중주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다. 1825년 완성한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의 피날레를 새로 썼기 때문이다. 6악장으로 된 이 작품의 원래 피날레는 연주시간 15분이 넘는 대푸가였다. 1826년 3월 슈판치히 사중주단이 초연했을 때 청중들은 이 ‘대푸가’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고, 언론은 “중국말처럼 이해 불가능하다”는 평을 썼다.

이 소식에 베토벤은 “짐승들! 멍청이들!”이라며 분개했다. 아르타리아 출판사에서 피날레를 좀 더 쉽고 단순하게 새로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베토벤이 순순히 응한 것은 의외로 보인다. 그는 “제일 좋은 게 바로 이 대목인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댔지만 이순(耳順)을 앞둔 거장답게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단순한 피날레를 새로 작곡했다. 1826년 가을, 베토벤이 죽음의 병상에 눕기 직전에 쓴 이 피날레는 베토벤의 작품 중 가장 즐겁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초월한 해탈의 경지다.

6악장으로 된 13번 현악사중주곡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가장 쉽고 짧은 2악장 프레스토와 4악장 독일 무곡을 먼저 들으셔도 좋다. 초연 때 청중들은 이 두 악장에서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처음부터 한 악장씩 들어보자. 1악장의 느린 서주는 삶을 대하는 엄숙함이 배어 있지만 알레그로 부분은 약동하는 삶의 기쁨이 넘친다. 3악장은 평온하고 유머러스한 스케르초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다. 5악장 ‘카바티나’는 ‘아다지오 몰토 에스프레시보’(느리게, 많은 표정을 담아)라는 지시어가 붙어있다. 이 곡에서 베토벤은 순박한 마음으로 삶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베토벤은 행복의 지혜, 즉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의 의미를 체득한 게 분명하다. ‘카바티나’는 짧고 단순한 노래란 뜻으로, 이 5악장은 베토벤이 자기 작품 중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한 대목이다. 이어서 천의무봉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6악장 알레그로, 베토벤의 진정한 마지막 작품이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https://youtu.be/XIn3ictF9SA

*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곡들은 번호와 달리 12번 Eb장조 Op.127, 15번 A단조 Op.132, 13번 Bb장조 Op.130의 순서로 작곡됐다. 이 순서를 기억하려면 Eb장조 곡이 네 악장, A단조 곡이 다섯 악장, Bb장조 곡이 여섯 악장으로 돼 있다는 점을 알면 된다. 나중에 작곡된 작품의 악장 수가 앞의 곡보다 하나씩 더 많아지며 구성도 점점 더 복잡해진다. 이 세 곡에 이어서 작곡한 14번 C#단조는 일곱 악장으로 돼 있으니, 같은 방법으로 기억하면 된다. 마지막 작품인 16번 F단조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네 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