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국립극장 70주년과 국립무용단
[성기숙의 문화읽기] 국립극장 70주년과 국립무용단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4.0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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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 팬데믹(pandemic)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지난 2월 중국 우한에서 비롯된 코로나19가 전세계로 급속하게 확산되는 추세다. 전 세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먹구름 속에 휩싸여 있다. 몇 달째 온 세상이 멈췄다. 국립극장 개관 7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각종 행사들도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알다시피 국립극장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개관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대구 피난시절을 거쳐 1953년 서울로 복귀하여 재개관하였고, 이후 서울 세종로에 있던 시민회관을 거쳐 명동국립극장에 둥지를 틀었다. 국립극장은 1973년 현재의 남산자락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70년의 역사를 품은 국립극장은 한마디로 한국 공연예술의 정신적 본산과 다름없다. 나아가 격동의 시기 아시아 최초로 개관됐다는 점에서 국립극장의 자부심 또한 남다르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 메이저급 공연장이 탄생하기 이전까지 국립극장은 한국 최고의 공연장으로 불렸다. 각 장르별 소속단체를 거느리고 있음도 강점이다. 국립극장은 2000년 정부방침에 따라 책임운영기관으로 변모하였고, 예술단체의 재단법인 전환으로 국립합창단·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 등이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옮겨갔다. 현재 국립극장에는 국립국악관현악단·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 등 3개의 예술단체가 소속돼 있다. 

국립무용단의 창단은 실로 극적이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한 무용계의 「최고회의에 올리는 공개 건의」가 수용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을 거쳐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용계는 황무지 상황에 놓여졌다. 당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자 무용가들은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한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국립무용단 창단은 당시 정부 시책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제3공화국을 개막한 박정희는 부정적인 정권이미지를 탈색하기 위해 민족고유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표방한 이른바 ‘문화주의’를 표방한다. 사회통합을 위한 국가이데올로기 구현과 자주적 문화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급선무였다. 국립무용단 창단은 공적(公的) 제도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용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립무용단 초창기 10년은 모색기로 간주된다. 한국무용을 비롯 신무용, 발레, 남방춤, 스페인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공존했다. 인적 구성도 다양했다. 전통무용가뿐만 아니라 신무용 2세대들이 대거 합류한 데서 알 수 있다. 정규직이 아닌 프로젝트시스템으로 운영됐지만 내셔널컴퍼니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초기 국립무용단은 일제강점기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조택원이 빠진 신무용 2세대들의 각축장이었다. 재능과 역량 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송범과 임성남이 최종 승자로 귀결되었다. 송범과 임성남은 각각 국립무용단, 국립발레단 단장으로 20년간 봉직하며 약 20여년 간 한국무용과 발레계를 호령했다. 

1973년 국립극장의 장충동시대가 개막되면서 국립무용단도 변곡점을 맞는다. 다장르체제에서 한국무용과 발레 전공으로 이원화된다. 한국무용 전공의 국립무용단은 관(官) 주도의 전문무용단체로서 재도약의 발판이 마련됐으며, 나아가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이라는 단체의 이념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 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한 송범이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을 표방한 국립무용단의 초대 단장으로 발탁된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송범은 한국적 무용극의 정립이라는 미학적 성취를 통해 이례적 발탁의 한계를 희석시킨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 설화를 소재로 예술적 정체성 구현에 충실하면서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시대를 선도한다. ‘도미부인’, ‘은하수’, ‘그 하늘 그 북소리’ 등 무용극 3부작이 이를 웅변한다.  1992년 국립극장의 운영방식의 변화, 즉 예술과 행정을 분리한 이른바 예술감독제의 도입은 송범의 퇴진을 앞당겼다.   

송범 이후 국립무용단 세대교체의 주역은 조흥동으로 귀결된다. 초대 예술감독 조흥동은 송범식 무용극에서 표방한 서사적 스토리 중심의 극적 형식에서 추상적 표현양식의 무용극을 추구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원초적 심미성에 토대한 우리 춤 고유의 질감은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된다.   

조흥동에 이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에 오른 최현은 8개월 남짓의 짧은 재임기간이 아쉬웠다. 국립무용단 시절 유일한 안무작 ‘군자무’는 그의 또 다른 작품 ‘비상’, ‘허행초’ 등과 더불어 해방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최현의 예술적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지 못한 것은 한국무용사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송범의 직계제자 국수호는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화두인 무용극적 전통의 극장예술적 다변화를 꽤하여 주목받았다. 송범식 무용극의 답습이거나 아류에 속한다는 평가도 없지 않지만, 고유의 전통유산과 동양중심적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스펙터클한 공간미학은 유의미한 예술적 성취라할 수 있다. 

국립무용단은 2000년대 이후 배정혜·김현자 예술감독을 거치면서 신무용 유산이 청산된다.  송범을 비롯 조흥동·최현·국수호 등이 전통춤 내지 신무용적 계보선상에 있다면, 배정혜·김현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창작춤 제1세대를 대표하는 실력파 춤꾼이자 안무자로 명성이 높다. 

배정혜는 국립국악원무용단, 서울시무용단,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섭렵한 유일한 무용가다. 무용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기념비적 이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신라의 빛’, ‘춤· 춘향’을 비롯 해외에서도 호평받은 ‘soul 해바라기’ 등을 통해 명작 제조기임을 입증했다. 

국립무용단 역사상 가장 현대적인 어법을 추구한 이는 김현자다. 그는 비디오예술 창시자로 세계적 아티스트 반열에 있는 백남준과 협업한 유일한 한국무용가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김현자는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바다’, ‘비어있는 들’, ‘매창’ 등을 통해 자연에 대한 관조적 태도, 시적 감수성, 서정성과 주관적 탐미주의 등 독창적 안무세계를 과시하며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외연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정리하건대, 한국적 무용극을 정립한 송범은 근대와 현대를 잇는 가교자로서 한국춤의 극장예술화 내지 직업적 전문화를 견인한 공로가 크다. 그 후속세대인 조흥동·최현·국수호는 계보학상 혹은 작품스타일상 송범이 추구한 무용극적 우산 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정혜·김현자의 경우, 전통춤의 관습화된 기법과 움직임 원리를 현대적으로 해체 변용하여 한국적 미의식의 창조적 지평확대를 통해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위상을 한 차원 높였다고 평가된다.

국립극장 70년을 맞아 반추하는 국립무용단의 예술미학적 궤적은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이라는 이념에 대체로 충실했다고 여겨진다. 앞서 열거한 무용가들은 격동의 시기 척박한 토양에서 치열한 창작정신으로 한국의 춤을 재건하고 꽃피우는데 전력을 다한 선구자로서 손색이 없다.  

국립무용단의 최근의 행보에 아쉬움이 없지 않다. 현재 그리고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해외안무가 또는 외부안무가 의존율이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무개념의 컨템포러리화, 무분별한 융복합 시도 등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이로 인해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이라는 애초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이념이 적잖이 훼손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또 지난 정부 시절 선보인 야심작 ‘향연’은 작품성을 떠나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도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국립무용단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안겨줬다.  

알다시피 국립무용단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된다. 국민의 문화예술향유 욕구를 충족시키고 한국무용의 예술미학적 진화를 선도해야할 의무가 있다. 민족문화의 정체성 구현을 화두로 공공성, 예술성, 대중성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작년에 부임한 국립무용단 신임 예술감독 손인영이 과연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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