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장석류 정동극장 차장 “예술가를 계속 꿈꾸게 하는 것이 행정의 역할”
[Culture Interview]장석류 정동극장 차장 “예술가를 계속 꿈꾸게 하는 것이 행정의 역할”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진보연 기자
  • 승인 2020.04.0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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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박사 논문 『문화행정의 가치충돌…』 발표
‘예술인, 행정인, 기획인’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 도드라져
예술가의 가치를 행정인이 정해선 안 돼

요즘 tvN 예능프로그램 <더블캐스팅>을 즐겨본다. ‘앙상블이여, 주인공이 되어라!’라는 슬로건에서 방송의 취지가 바로 드러난다. 누구보다 열심히 뮤지컬 무대를 채우고 있지만 주목받지 못 했던 앙상블을 위한 오디션. 우승자에겐 대극장 주연 캐스팅의 기회가 주어진다.

프로 무대에 오를 만한 실력을 기본 전제로 두고, 연출가·음악감독·동료 배우 등으로 이루어진 멘토단은 참가자를 각자의 기준에 맞게 평가한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였으나 무게를 두는 역량에 따라 선택의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장일치 혹은 과반수의 표를 받아야 캐스팅 기회를 얻는 룰이 있으니, 결국 멘토의 의견 하나로 최종 우승자가 바뀔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인 여러 집단의 모임에서 자주 나타나는 양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 지식, 기술, 재화 등의 자원이 필요하다. 하나의 개인 혹은 집단이 모든 능력을 갖출 수 없기에 연대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한배에 올랐으나, 각자의 경제력, 특화된 분야, 문제 해결 방식 등 지향하는 목표 외엔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정동극장 장석류 차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은 이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부족’의 만남이라 칭한다.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한 그는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약 13년간 조직 안에 있으면서 공연 제작PD, 마케팅 팀장, 경영 팀장 등의 보직을 두루 겪으며 느낀 답답함이 그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최근 발표한 박사 논문『문화 행정의 가치충돌에 관한 실증연구』는 그를 채우던 궁금함과 갈증의 증거다. 

문화 역량이 곧 국력이 되는 시대 흐름에 따라,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과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행정은 문화융성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선택한다. 제도적, 경제적인 지원으로 그들의 예술 활동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들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규정과 절차로 결과를 이야기하는 행정과 비계량적인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예술의 성질은 상극에 가깝다.

장석류 차장은 다른 부족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한쪽에 종속되기보다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이는 연구로 이어졌다. 예술인의 언어가 모국어였던 그는, 행정학이라는 제2외국어를 배우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그는 예술행정을 지구에서 보는 달에 비유하며, 행정은 달의 앞면이 아닌 뒷면이라고 말한다. 뒤에서 받쳐주는 행정이 있어서 앞에서 예술이 밝게 빛날 수 있다는 의미다. 

연구를 통해 그는 행정의 가치와 문화의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치분배의 방향성, 상호이해의 확장에 대한 함의를 찾고자 했다. 서로의 발목이 아닌 손을 잡으며 이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꿈꾸는 정동극장 장석류 차장을 정동극장 근처에서 만나, 이번 논문을 발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논문 통과 축하드린다. 통상의 박사 논문들이 그렇긴 하지만, 수고가 만만찮아 보인다. 논문을 완성한 소회가 궁금하다

논문을 시작할 2016년 당시 블랙리스트 등의 사건을 겪으며 궁금증이 생겼다. 정치·행정이 변하면 왜 문화예술은 종속되어 같이 변해야 할까? 이 질문에 따른 갈증은 지속 가능함이었다. 공공극장 조직문화로서 전통, 예술단의 전통, 사업 자체의 전통과 같은 ‘운영과 방향성에 대한 전통’을 축적하고 싶은데 왜 변동성에 연동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예산이라는 저수지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물줄기로 분배되며, 강이 되어 흐른다. 문화예술은 강줄기 옆에 나무와 꽃을 심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채 성장하기도 전에 물줄기의 방향은 바뀌고, 애써 심어놨던 나무와 꽃은 말라 죽는다. 이후 기관장이 바뀌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물줄기는 또 방향을 달리한다. 

문화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문화부가 없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술을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느니, 행정 혹은 국가의 역할이 아직은 필요하다. ‘행정이 문화예술을 만났을 때, 좋은 행정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 질문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결과물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결과물을 가지고 좀 더 많이 이야기해보고 싶다.

행정인, 기획인, 예술인 간에 ‘가치 충돌’에 대한 내용이 논문의 주요 줄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싶었는지

행정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면 예술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영역이다. 이에 예술·행정이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부족이 모여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올해 정동극장 첫 공연 '적벽' 공연 장면(사진=정동극장)
▲올해 정동극장 첫 공연 '적벽' 공연 장면(사진=정동극장)

연구의 범위는 ‘정부 행정인·지원기관 행정인·기획인·예술인’ 집단으로 나눴다. 집단 간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를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했고 그로 인해 가치충돌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가치는 정책의 목표설정, 세부사업 진행과 평가를 할 때 기준의 씨앗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가치는 하나씩 보면 좋은 것이지만, 집단의 가치가 서로 조화되지 못하면 갈등을 유발한다. 부족 내에서는 상식적인 가치지만, 집단 간에는 상식적인 가치의 충돌이 발생한다. 부족 간에 옳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우선순위가 궁금했다. 박사학위 수료 후, 2년간 업계에 종사하는 233명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가치충돌 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분배할 때, 행정인·기획인·예술인 간에 힘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나

우리 사회는 수직적 요구에 중독돼 있다. 그리고 서로의 계층제는 자원 의존 관계에 있다. 위에서 힘을 가하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가치에 동조가 일어난다. 행정의 힘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강압적 가치가 작용할 경우, 과거 블랙리스트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연구를 시작할 당시, 이미 블랙리스트 문제가 발생한 이후가 아닌지

맞다. 연구 소스를 받은 것은 정권이 바뀐 다음의 일이다. 블랙리스트가 작동했던 시점이 아닌, 2019년 상반기 시점의 데이터였다. 그 때문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가설을 세웠던 블랙리스트 사건 당시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가정도 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행정의 힘은 여전히 압도적인 상태다.

행정이 당위적으로 힘의 우위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과거 사건의 충격과 그 영향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조사 결과 또한 지금까지 일하며 누적되어 온 결과를 토대로 답변했기 때문에, 정부를 쪼개기보단 한국 문화 행정에 대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정동극장 장석류 차장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

연구의 주요 테마 중 하나가 자율과 책무의 충돌이었다. 자율과 책무는 법과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하는 문제이지만, 어느 정도의 여지는 항상 존재한다

자율과 책무는 연구의 메인 테마였다. 자율과 자유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미가 있지만, 자율은 스스로 방향성과 기준을 정할 수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자율은 책무에 구속된다. 그런데 행동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는 구속범위를 내가 정하는 것과 위에서 정해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오랜 기간 자율이 없으면 노예근성이 쌓여, 시키는 책무만 하게 된다. 이번에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문화부와 서울시 관련 예술기관과 공공극장에서는 단 한 번도 내부의 직무자가 조직의 리더가 된 이력이 없다. 내부자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이것이 누적되면 조직 내에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상상적 가정’ 조차 사라진다.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것이고,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것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높은 수준의 책무를 끌어낸다. 

내부에서 승진을 통해 리더를 결정할 경우, 사내 정치에 대한 위험이 있지 않나

내부에서 선발한 리더가 외부인의 수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은 예술기관에서 30년 동안 내부 리더가 존재하지 않았던 0이라는 수치가 슬펐다. 상황에 따라 판단하에 임무를 맡기는 가능성을 열어뒀으면 한다. 신뢰가 결핍되면 재량권이 빈곤해진다. 보고만 하면 되니 이는 책무의 감소로 이어진다. 

행정과 문화예술이 만났을 때 좋은 행정이란, 예술가들이 당당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지원하고 관리해주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책무에 자율이 물려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짜 책무란

예술인이 꿈꾸는 바를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절차적 책무는 행정이 더 짊어져야 한다. 더 잘하니까. 예술가의 가치를 행정인이 정해선 안 된다. 예술가가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행정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예산이 쓰이고 있고, 재원은 항상 부족한 상황이니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 행정에는 있다. 다만 조력하는 태도가 아닌, 시혜를 베푸는 듯한 모습에 대한 문제 제기로 보인다

그렇다. 어쩌면 한국 행정은 예술을 대할 때 ‘헛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내길 요구한다. 이것은 예술가가 ‘궁극적인 예술적 책무’를 포기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정동극장 예술단 첫 정기공연 '시나위,夢' 컨셉사진(사진=정동극장)
▲정동극장 예술단 첫 정기공연 '시나위,夢' 컨셉사진(사진=정동극장)

행정과 예술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점차 그 과정에서 방향성의 차이가 발생하고 결국 충돌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모든 대상자에게 ‘표현의 자유’와 ‘국가 가치 체계 위에서 지원’을 충돌시켰을 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현실에서는 압도적으로 국가주의가 표현의 자유보다 우위라고 느끼고 있고, 당위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더 보장되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예술은 시대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리트머스 시험지로, 시대의 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파란색이 나오는 예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을 마주함으로써 다른 이와의 이해, 공감, 확장, 뒤섞임을 경험해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행정은 예산을 낭비해선 안 되고,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사용을 강조한다. 하지만 원활한 작동보다는 부작용과 문제점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경영과 차별화되는 행정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체는 공공(公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과평가 공공성 판단 기준에서 효율성에 대한 지표의 쏠림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지나치게 효율성에 집중하다 보니 사업성과를 단기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지원 예산은 유장하게 흘러줘야 한다. 행정도 창의적인 진행이 필요하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효율성 책정보다는, 길게 보는 행정의 창의성이 요구된다.

▲정동극장 장석류 차장의 인터뷰 모습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의 인터뷰 모습

또 하나는 절차에 대한 속도다. 빠른 속도에 집착하다 보면 절차적 형평을 잃어버려 나중에 더 큰 비용과 비효율로 돌아올 수 있다. 형평성 있게 분배하고 진행하는 것만이 효율성을 높여준다. 속도의 효율은 2020년 현재, 실제적인 효율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현 정부는 공정과 형평을 강조한다.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문화 행정 일선에서도 형평에 대한 압력을 많이 받고 있으나, 그에 비해 형평이 잘 작동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모든 사람이 아닌,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불평등’의 상태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현실은 형식적인 형평과 공정성만을 따진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곳에 소신 있게 차등을 두는 것이 아니라, 특혜가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 형평에만 관심을 둔다. 

담당자와 조직에 대한 신뢰는 소멸했고, 이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대가다. 어떻게 신뢰를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신뢰의 기초가 무너지면 좋은 떡잎이 기계적 형평에 붙잡힌다. 떡잎을 키우는 작업은 형평성 관점에서 바라봐선 안 된다. 예술작품은 민주주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 현재는 그러하다. 

▲정동극장 외관(사진=정동극장)
▲정동극장 외관(사진=정동극장)

형평성이 시민 다수의 눈높이라는 허위적 강박 또한 예술의 발목을 잡는다. 대중의 눈높이라는 임의의 기준이 창의적인 예술의 욕구와 표현의 자유 및 시도를 가로막고 있다. 형평에 대한 기준의 결과치가 쌓인다면 궁극의 책무도 더 개선되리라 생각한다. 시대가 변하면 형평의 조절 가치도 바뀌어야 한다.

예술가들이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 동안은, 지원해주는 곳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나

행정인이 생각하는 고객과 예술가가 생각하는 고객, 기획인이 생각하는 고객에는 차이가 있다. 행정이 예술의 의사결정권을 침해한다는 부분은 기획과 예술인이 만나고 싶은 고객에게 가고 있는데, 행정인이 생각하는 국민의 눈높이에는 (기획인과 예술인의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행정에서 바라보는 고객의 평균적 기대는 얘기할 수 있지만, 기획인과 예술인이 지향하는 고객을 향해 더 열려있는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논문을 쓰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줄 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에겐 공동의 목표가 있다는 믿음이 연구를 가능케 했다. 연구의 목표와 결과를 다 같이 궁금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신뢰가 결핍된 상태지만, 서로의 오해를 이해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많은 이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다만 행정인, 기획인, 예술인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 영역에도 불구하고, 바라보는 지평과 고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행정인은 봉우리만, 기획인은 능선과 골짜기만, 예술인은 나무만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지평의 융합이 필요하다. 

융합을 위해서는 소통하고 만나야 한다. 연결망은 정보가 흐르는 장이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형성되는 틀이다. 연결망이 강해지려면 사소한 노력이나마 신뢰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조직 안에서 여러 보직을 겪으며, 문화 행정에서 바람직한 행정의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이 논문은 기획인과 예술인의 거울에 비친 행정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나 행정인을 앞에 두고 ‘문화예술은 이런 식으로 봐주셔야 합니다’라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하고 싶다. 제 안에서 지평의 융합을 해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