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1회
[연재] 딱지 11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11.26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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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몽키 스빠나 (1)

408호의 두 번째 방문객은 바로 옆집 407호의 찬홍이 엄마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우호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데 물을 그렇게 많이 쓰고 있어요?

빨래를 하다 말고 문을 열어 준 미순에게 그녀는 다짜고짜 야단부터 쳤다. 배구선수처럼 우람한 체격에 얼굴도 눈도 크고 무섭게 생긴 여자였다. 영문도 모르면서 미순은 우선 그 모습에 기가 질렸다.

여기 물은 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그런 수돗물이 아니에요. 공동우물에서 끌어다가 옥상 물탱크에 받아 놓고 쓰는 금쪽같은 물이라 그 말예요.

듣고 보니 금쪽같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학동주택에서 사용하는 물은 마을에다 돈을 내고 끌어다 쓰는 간이상수도였다. 논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은 지금까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주택이 들어서면서부터 물이 부족하게 되었다. 물값을 받기는 하지만 마을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을 아껴 써야 하는 이유는 보다 더 심각한 데 있었다. 우물이 바닥을 보이게 되면 주택의 물탱크도 같이 바닥을 보이고 그렇게 되면 수도 파이프에 공기가 차서 애를 먹게 되는 것이다. 찬홍이 엄마는 그것을 ‘에어가 찬다’고 했다.

여기 살자면 서로서로 물을 아껴 쓰고 조심을 해야 돼요. 빨래라든가 물을 많이 쓸 일이 생기면 반드시 옥상에 올라가 물탱크를 확인해 보구요. 무슨 얘긴지 알았죠?
예. 알았어요.

얼떨결에 대답은 해 놓고도 미순은 에어가 찬다는 게 어떤 건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옆집에서 물소리가 들릴 만큼 날림으로 공사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데 찬홍이 엄마가 다녀간 지 불과 이틀 만에 그 일이 벌어졌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멀쩡하게 잘 나오던 물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뚝 끊어진 것이다. 미순은 부리나케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물탱크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이 드러난 물탱크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쫄쫄거리며 힘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우물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순은 우선 찬홍이 엄마한테 변명할 말부터 생각했다. 나는 설거지만 하고 있었다. 절대로 물을 많이 쓰지 않았다. 다른 집에서 빨래나 대청소를 한 것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도 찬홍이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도록 물도 나오지 않았다. 미순은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 동안 물이 차서 물탱크에는 목까지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408호로 내려오는 파이프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미순은 비로소 에어가 찼다는 뜻을 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정구가 나설 차례였다.

당신이 수도 파이프 좀 봐 줘야겠어요.
수도 파이프는 왜?
에어가 차서 물이 안 내려오는 것 같아요.
에어가 차다니?
공기 말예요 공기. 물이 떨어져서 파이프에 공기가 들어갔는데 그게 안 빠지니까 물도 안 나올 수밖에요.

싱크대 아래에 있는 파이프의 이음새를 찾아내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꽉 조이고 있는 볼트를 풀 도리가 없었다. 뻰치가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주먹만 한 볼트였다. 정구는 망치로 볼트를 꽝꽝 때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팔만 뻗친 채 하는 작업이라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서 싼 것이 비지떡이라고 했어. 에어를 빼야 물이 나오는 이런 거지 같은 놈의 집이 어디 있어?

정구로서는 짜증이 나 무심코 한번 해 본 소리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큼 앙칼진 대꾸가 돌아왔다.

당신이 그럼 3백만 원 들고 나가 새 집 한번 구해 봐요. 방 두 개에다 에어 안 빼도 물이 콸콸 나오는 그런 집 한번 구해 보라구요.

때맞춰 찬홍이네 식구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미순한테 호되게 당했을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