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정진우감독과 60년대 청춘영화-
[연재 충무로야사] -정진우감독과 60년대 청춘영화-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1.2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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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영화 ‘4월이 가면’을 통해 김하림군과 필자의 영화계 입문기를 서술하자면 아무래도 60년대 소위 청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붐을 일으킨 정진우감독을 먼저 소개하는게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순서일 것이다.

1938년 경기도 김포출생.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동대학 연극부에서 연출가로 활동. ‘돌무지’,‘죽음의 다섯손가락’등의 감독 정창화감독 문하에서 임권택감독과 함께 조감독으로 영화계 입문. 1963년 영화 ‘외아들’로 영화감독 데뷔.

이렇게 기술하면 그 역시 평범한 영화감독일 뿐이다. 그러나 그에대한 영화사적 업적과 평가는 이쯤에서 멈출수가 없다. 그는 데뷔 이듬해 ‘배신’, ‘목마른 나무들’, ‘밀회’, ‘가을에온 여인’ 등을 연출했을 때 까지만해도 그다지 두각을 나타낼만한 걸출한 감독으로 운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6년 ‘초우’,‘초련’,‘하숙생’,‘악인시대’등의 청춘영화를 잇따라 연출하면서부터 그의 파워풀한 추진력과 잠재적 연출역량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지로 분수처럼 치솟아 오른다.

특히 영화 ‘초우’는 후일 서울대학생들로부터 최악의 영화상을 받았을만큼 허구성이 강하고 리얼리티가 결여된 내러티브(서사구조)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전국 흥행가를 석권하는 대박영화가 되었다.

이어 당시 최고권위문예지인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송소희의 장편 ‘그날의 햇빛은’을 영화화한 ‘초련’, 인기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하숙생’등이 ‘초우’의 대박을 또다시 더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돌변시켰다. 또한 인기절정이었던 대형여가수 패티김이 부른 영화 ‘초우’의 주제가와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주제가는 이를 한층 더 부추기는 추임새 역할을 했다.

가뜩이나 패기만만하다못해 광적일 만큼 저돌성을 가진 그는 자신의 영화적 열망을 위한 초고속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춘희’, ‘정부마농’, ‘밀월’ 등 외국의 명작소설 영화화는 물론 ‘별아 내가슴에’, ‘하얀까마귀’ 등 국내 인기라디오 및 TV연속극등을 모두 자신의 영화컨셉으로 흡수했다.

김하림군의 ‘4월이 가면’은 슬그머니 이 청춘영화의 붐에 편승했다. 캐스팅은 이만희감독의 ‘흑맥’과 정진우감독 ‘초우’에서 청순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단숨에 톱스타그룹에 합류한 문희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공모에서 뽑힌 신인남배우 성훈이 공연했다.

주제가는 역시 ‘초우’의 주제가를 부른 패티김이 불렀는데, 저 유명한 프랑스의 샹송가수 앙리꼬마샤스의 ‘라무세뿌리앙’의 번안곡이었다. 그러나 흥행은 ‘초우’, ‘초련’, ‘하숙생’의 대박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어쨌든 김하림군은 이를 계기로 ‘구름’, ‘파란이별의 글씨’등 여고생,여대생취향의 청춘영화 시나리오로 자연스럽게 정진우 영화캠프에 합류했다. 물론 나는 이쯤에서 김군과의 시나리오작업에서 의도적으로 슬쩍 빠져버렸다.

나는 그때까지도 영화 타이틀백, 서브타이틀에 내이름이 클로즈업 되는 것 보다는 권위있는문예지 ‘현대문학’, ‘문학예술’, ‘자유문학’이나 신춘문예 당선작발표란에 내이름석자를 올리는 것이 궁극적인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김하림군은 유망한 신인시나리오작가가 되었다. 나는 이츰저츰하다가 미욱하게도 연말이면 신춘문예 열병에 두통과 몸살을 앓는 소설가지망생으로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그때 문단에는 이미 서울대 불문과 출신의 김승옥이 단편소설 ‘생명연습’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후일 ‘장길산’으로 유명해진 황석영이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입석부근’, ‘탑’ 등으로 데뷔하였으며 이청준이 역시 사상계에 ‘퇴원’으로, 최인호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로 당선되어 화려한 문단의 신세대작가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게도 그들보다 세련되고 격높은 명작을 발표할때가 오겠지...

하지만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의 시처럼 그리도 찬란한 문단의 영광과 초원의빛은 내게 쉽게 비춰지지 않았다.

김하림군은 그런 나에게 약이라도 올리듯 계속해서 시나리오 개런티를 받아와 가난한 하숙생들에게 막걸리파티를 열어주었고 내게 끊임없이 하루빨리 소설습작을 때려치우고 시나리오작가로 데뷔할 것을 권했다.

그즈음 고향에서도 빠듯했다.송금되던 하숙비도 급변한 집안사정으로 뚝 끊어졌고 주변의 하숙생들도 어려운 경제사정때문인지 학업을 중단하고 하나둘 우울한 귀향을 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김하림군의 시나리오작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군과 함께 영화사가 즐비한 충무로3가에 나가 마치 이물질처럼 북적대는 영화패들의 무리속에 뒤섞이고 말았다. 

내가 실제로 정진우감독을 본 것은 이 무렵 영화촬영장에서 였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