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통찰력과 혜안 지닌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안중근은 통찰력과 혜안 지닌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 정혜림 기자
  • 승인 2009.11.2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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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보다 100년 앞서 국가 공동체 제안!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안중근은 일본 정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다.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사상에 대해 강의한 이태진 교수

총탄이 발사된 순간, 한일 양국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고, 이 사건은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아시아의 반제국주의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일까.

11월 4일부터 25일까지 4주에 거쳐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진행된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근대사 재조명> 강의는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 질의 응답 시간을 통해 강의의 열기가 더했졌다.

이태진 교수는 우선 이른바 친일적, 급진적 개화파(김옥균 등) 중심의 근대화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며, 이러한 인식 자체가 1910년 강제 병합 후의 식민주의적 역사해석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일본측이 한국정부의 개화 의지와 시책 성과를 매장할 목적으로, 무능한 국가는 보호국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합법론이나 시혜론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인의 근대사 인식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1897년 대한제국기 광무개혁 이후 정부 차원의 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는데, 일본이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국 국권을 탈취한 것은 더는 한반도 장악이 어려울 것을 판단, 조기박멸책을 가동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태진 교수는 역사의 어두운 흔적을 살펴보면 '대한제국 정부의 저항이 조약문과 조약 과정 곳곳에 나타나있다. 적어도 일본측은 한국병합이 합법적이었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또 일본은 외무대신 코무라 준타로에게 정탐을 위임하고 안중근을 극형으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에 '고종황제는 그를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고종은 당시 정치고문이었던 미국인 '헐버트'에게 상해덕화은행에서 예금 15만엔(전액, 쌀 5만석)의 인출을 위임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황제밀사를 파견하여 독려활동을 한다. 또 미하일로프 변호사, 상해의 다글라스 변호사와의 접촉하여 민영찬, 민영익, 현상건 등에 지원하는 방법도 취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2월 안중근과의 면회만 이루어졌을뿐, 고무라 대신이 보내온 외국인 변호 불호 방침에 의해 탐문 조사에는 일본인 변호사만이 참석하게 된다.

특히 24일 마지막 시간에는 안중근 의거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사상(東洋平和論)'이 중점적으로 강의됐다.

▲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저술한 동양평화사상(東洋平和論)

안중근은 1910년 1월 초부터 1910년 3월 26일, 여순(뤼순) 감옥 독방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감옥에서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합하면 이기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치다'로 시작하는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이렇다.

▲ 체포 후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 왼손 약지의 단지 흔적이 보인다.
안중근은 20세기 초, 다가오는 동서의 갈등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기계문명을 앞세운 서양의 세력을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협력하여 막아내야 동양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서술했다.

이를 위해 우선 공동 군단을 결성하고, 참가 청년은 타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도 언급, 서양의 밀려오는 세력에 맞서는 몸짓을 보였다. 또 평화회의 기구를 설치하고, 3국공용 화폐를 발행하여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한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에 성공하면 태국, 인도로의 확대를 꿈꾸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항일구국운동의 차원에서 독립투사로만 기리기에는 안중근 의사는 너무 큰 인물이라며 지금까지는 저격 사실만 드러났지만 앞으로 동양평화를 주창했던 선각자적 혜안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안중근 의사가 꿈꾼 '동양평화사상'은 평화공존의 국제주의를 뜻한다며 모든 것이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 언급했다.

이는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패강(覇强)이 아니라 어질고 약한 존재가 중심이 되는 인약(仁弱)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사상으로, 지금도 절실한 한ㆍ중ㆍ일 3국간의 협력의 필요성을 이미 100년이나 앞서 구상해낸 것이라 설명했다. 

강의가 끝나고 이태진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교육의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형상'이라며 우리 자신이 이렇게 잘못된 역사지식을 가지는 한, 한ㆍ일 간의 역사분쟁은 극복될 수 없다고 전했다.

또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던 고종황제에 대해 무능하고 힘없는 황제로 서술하고 있는 교과서 또한 식민 정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편견에서 비롯된 잘못된 역사의식을 바로잡고 바른 역사, 밝은 미래를 위한 역사의 뿌리 알기에 더욱 힘쓰겠다고 밝혔다.

▲ 삼성출판박물관의 김종규 관장이 참석, 자리를 더욱 빛내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한국근대사 재조명> 강의를 마련한 삼성출판박물관의 김종규 관장은 '오늘 이태진 교수 덕분에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며, 일본이 고스란히 답습한 식민 정책이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것에 유감을 표했다. 더불어 앞으로 이러한 강의를 지속적으로 마련하여 우리 민족 바로 알기에 앞장 설 것이라 전했다.

서울문화투데이 정혜림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