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거리와 문화와 국력
책과 거리와 문화와 국력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11.2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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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방 ‘가가린’에서 배우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迎秋門)길을 따라 걷다가 심상찮은 발견을 또 하나 한다.

허름한 건물 1층에 자리해 언뜻 지나치기 쉬운 공간 ‘가가린’이라  이름붙인 헌책방이다. 청계천에서나 볼 수 있는 헌책방인지라 호기심에 들렀다가 뜻밖의 발견을 한다. 여느 헌 책방과는 다른 새로운 트랜드가 이 책방에서 시도되고 있다. 

 우선 이 공간은 처음부터 책방을 세우려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영추문 길이 좋아서 모여든 갤러리, 디자인 사무실, 카페, 건축사 사무소 주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뜻을 모아 본인들과 동네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방엔 정확히 책이 몇 권인지 수량은 알 수 없다. 그저 미술과 사진 관련 서적들과 인문학 쪽 책들이 수북이 꽂혀 있다.

공간을 처음 마련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전공분야 또는 업종 분야와 관련 된 책들을 하나 둘 가져 오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찾는 사람들도 구분이 분명하다. 출판업계 종사자들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이 동네 주민들이다. 이 공간을 마련한 사람들의 의도대로 되어 간 것이다. 

 운영방법도 특이하다. 1년 회비 2만원, 평생 회비 5만원을 내고 가입하면, 헌 책이나 옷가지 등을 가져 가 팔 수 있다. 물론 다른 회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퀼리티가 받쳐줘야 한다. 판매 가격은 위탁 회원이 정하고, 판매시 수수료 30%를 제한 금액을 돌려준다. 책의 경우 회원 중 출판업계 종사자들이 많다 보니 시중 서점에서 볼 수 없는 귀한 책들도 있다. 이렇게 해서 현재 회원 수가 200여명이 됐다.

여러 명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함께 만든 공간을 사심없이 운영하다 보니, 오히려 좋은 아이템과 운영 노하우가 쌓여가는 셈이다. 나아가 여기서 소규모 행사를 열 수 있도록 영업시간(12시 30분~19시 30분) 이후 공간을 빌려주기 까지 한다. 대관료는 3시간 기준 10만원인데, 행사 1주일 전에 신청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헌 책방 ‘가가린’은 눈길을 끈다. 최초의 인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우주로 비행하는 첫 시도를 한 데서 책방 이름을 붙인 그대로다. ‘첫 시도’의 설레임과 발전 가능성이 이곳에 보인다. 

 ‘영추문길’이 어떤 곳인가? 지금이야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이름을 따 운치 섞인 지역명칭이 됐지만 과거엔 권력과 권위와 이념의 압박이 지배했던 청와대 앞 동네가 아닌가. 영화 ‘효자동 이발관’의 스토리 전개가 보여줬던 그런 분위기가 충천했던 곳이다. 그런 이곳에 어느 날 갤러리와 카페와 골동품 점과 디자인 사무실 등이 하나 둘 자리 잡더니 어느 새 ‘문화거리의 꽃’이라 할 만한 책방이 당당하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책방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거리 자체가 문화거리로서의 트랜드를 완성하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인사동에 고서점 ‘통문관’이 있고, 서예전문 백화점인 ‘이화 문고’가 있으며, 삼청동에 ‘진선 북카페’ 등이 있어 문화거리를 완성해 주듯 이제 청와대 앞 영추문 길엔 ‘가가린’이 있어 문화거리로서의 면모를 완성하는 셈이다. 

무릇 서점이 흥해야 나라가 흥할 터이다. 이웃 일본엔 주부의 시장바구니에 책이 있고, 한 블럭 건너 서점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엔 한 블럭건너 노래방이며, 약국이며,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점심시간 남은 시간에 서점을 배회하지만, 한국인들은 점심시간에 당구장 또는 노래방에 간다는 말이 있다.

책 읽는 국민은 책읽지 않는 국민의 우위에 서고, 책 읽지 않는 국민은 책 읽는 국민의 지배를 받게 돼 있다. 10년 쯤 전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 중의 하나인 ‘종로 서적’이 문 닫는 것을 지켜 봐야 했던 적이 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을 맞아 우연히 발견한 작은 헌 책방 ‘가가린’을 보며 새삼 책과 거리와 문화와 국력의 상관성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