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기’ 찢는 춘향의 등장…“시대에 따라 극도 소리도 변한다”
‘불망기’ 찢는 춘향의 등장…“시대에 따라 극도 소리도 변한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0.05.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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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2020 신작 ‘춘향’, 14일 개막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단옷날 방자와 함께 광한루에 올랐다가 그네를 뛰던 춘향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그날 밤 몽룡은 춘향의 어미 월매 앞에서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원한다는 뜻을 밝히며 증서 ‘불망기(不忘記)’를 써서 자신의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한다.

국립창극단의 2020년 신작 ‘춘향’ 속 춘향은 몽룡이 보는 앞에서 증서를 거침없이 찢는다. 확실히 우리가 알던 춘향과는 다른 모습이다.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이번 작품의 극본·연출을 맡은 김명곤 연출은 극 중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10대, 20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3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춘향’ 프레스콜에서 김명곤 연출은 “춘향이가 증서를 찢는 연출은 처음”이라며 “종이 한 장의 서약에 마음을 다 맡기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믿는 좀 더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출은 “춘향전은 이미 200~300년 전의 이야기”라며 “고전 춘향전의 아름다운 선율은 최대한 살리되 스토리와 인물 설정은 과감하게 수술했다”라고 말했다. 판소리 사설의 고어는 현대어로 풀어 우리말 맛을 살리면서 동시에 이해를 높였다.

원전 ‘춘향전’은 이몽룡이 나귀를 타고 광한루에 놀러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춘향’에서는 춘향이 향단이와 놀러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춘향을 중심에 두는 포커스의 변화다.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또한 극 전개에 속도감을 더했다. 수년이 걸렸던 몽룡의 과거급제는 수개월로 압축됐다. 시간의 단축에 따라 극의 템포도 빨라졌다. 

유수정 예술감독은 “시대에 따라 극도 소리도 변화한다”라며 “30대 때 내가 맡았던 춘향과 지금 춘향을 비교해보면, 의상, 연출, 음악 등 많은 것이 바뀌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창극은 동시대의 의식과 감성에 맞춰 변화하되 뿌리인 판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작창을 맡은 유 감독은 “단원들에게 장단이 빨라지거나 느려져도 소리의 공력과 시김새, 즉 소리가 가지고 가는 기술적인 면은 숨소리까지 허투루 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유 감독은 음악적 섬세함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만정제 ‘춘향가’를 바탕으로 동초제·보성소리에서도 소리를 가져와 특색 있는 소리를 짰다.

아울러 김명곤 연출은 인물의 성격에 과감한 변화를 주되, 국립창극단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연출은 “국립창극단은 지난 10여 년간 ‘패왕별희’, ‘트로이의 여인들’ 등 다른 나라 고전을 각색하거나, 한국의 고전을 파격적·현대적으로 해석한 실험적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라며 “관객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이기도 했으나 창극단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그는 “뮤지컬·오페라·연극 등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는, 창극단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라며 “판소리의 선율과 노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하는 것이 국립창극단의 임무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춘향 역에는 국립창극단 대표 주역 이소연, 신예 소리꾼 김우정이 더블 캐스팅됐다. 맑은 성음과 풍부한 연기력을 갖춘 이소연은 창극 ‘춘향 2010’(2010)과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에 이어 이번에도 춘향으로 낙점됐다. 국립창극단이 지난 2월 실시한 공개모집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김우정은 TV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젊은 소리꾼이다.

오디션을 통해 김우정을 발굴한 김명곤 연출은 “원전의 주인공 나이인 10대에는 소리가 무르익어서 주인공을 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가수를 찾기가 어렵다. 20대 소리꾼 가운데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신인들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라며 “열심히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판소리계 수많은 인재들의 희망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지난 2014년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에 출연했었던 몽룡 역의 김준수는 “원점으로 돌아와 본질의 소리를 많이 표현하려 노력했다”라며 “현 \시대와 소통하면서 다른 해석으로 고전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프레스콜 모습

김명곤 연출가는 “코로나19 관련 지침으로 그간 배우 10명 이상이 모일 수 없어 부분 연습이 많았다. 한 장면씩 다듬고 합치는 과정을 3개월간 거듭했다. 어려운 연습 과정이었지만, 취소되지 않고 무사히 공연을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며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달하고, 순수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주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객석 띄어 앉기’가 시행된다. 창극 ‘춘향’은 5월 14일부터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