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북으로 간 무용가들
[성기숙의 문화읽기] 북으로 간 무용가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5.16 04: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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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오래 전 얘기다. 30여 년 전 어느 날 월북무용가에 대한 월간지 연재를 위해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다. 유난히 화초를 좋아했던 선생은 그날도 과천 주공아파트 베란다 가득 다양한 자태의 난(蘭)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선생은 옛 기억을 반추하는 것을 굉장히 고통스러워했다. 한 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겨우 북으로 간 무용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당시 월북무용가 숫자가 무려 5,60여명에 달한다는 선생의 말씀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알다시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정부는 월북예술인에 대한 해금조치를 단행했다. 그후 각 예술분야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해금되어 재조명되었다. 신화 속 인물로 베일에 쌓여있던 최승희의 실체도 서서히 드러났으며 그가 20세기 한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월북무용가를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 이른바 해방공간과 6·25전쟁을 통과하면서 약 5,60명에 달하는 무용가들이 월북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최승희의 직계 제자 장추화의 월북은 무용사적으로 일대 사건에 속한다. 훤칠한 키에 서구적 외모를 지닌 장추화는 최승희를 빼닮은 모습으로 주목을 끌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장추화는 스승 최승희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 동숭동에 무용연구소를 마련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과 산조춤의 명인 김진걸이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손꼽힌다.

장추화의 월북 시기는 6·25전쟁 직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1949년 12월 초순에 열린 「구국문인궐기종합예술제」에 참가하여 스승 최승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주로 문인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 무용가인 장추화가 등장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평소 좌익성향의 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배경이 작용된 듯 싶다. 또 민족자본가 김연만이 장추화의 후원자였다는 설도 있다. 좌익성향의 문인들이 그의 월북에 영향 미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밖에 장추화의 작품에 투영된 민족주의적 색체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당시 장추화의 현실 발언도 주목된다. 그는 언론기고문을 통해 “봉건주의 사상에 함몰되어 무대를 특권계급의 유흥장으로 여기어 기생이나 광대의 노름터”로 인식하고 있음을 통렬히 비판한다. 나아가 무용계의 후진적인 풍토와 일부 지도자의 낡은 시대인식에 대한 공격도 날카로웠다.

월북(또는 납북) 무용가 한동인이 무용계에서 처음 회자된 것은 2003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무용평론가 조동화 선생의 주도로 ‘무용가를 생각하는 밤’ 기획을 통해 한동인이 조명된 바 있다. 주소 한 장 들고 한동인의 후손을 찾아 수원 시내를 누볐던 때가 엇끄제 같다. 당시 한동인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 그의 긴박했던 예술적 여정에 감동하고 전율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강원도 고성 태생의 한동인은 명문사학 배재중학을 졸업하고 명무 한성준 문하에서 조선춤을 배우다가 1930년대 후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에서 러시아 황실발레학교 출신 엘리아나 파블로바에게 발레를 체득하고 1940년대 초반 귀국했다. 그는 해방직후 조선무용건설본부 또는 조선무용예술협회 등 여러 조직체의 창립에 가담하는 등 당시 좌우익의 대립과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동인은 1946년 서울발레단을 창단하고 첫 작품으로 고전발레 ‘라 실필드’를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매년 정기공연을 통해 서양 고전발레를 선보이고 ‘민족의 피’, ‘사신과 소녀’, ‘꿩’, ‘인어공주’ 등 창작발레를 공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며 발레의 보급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전문 스텝의 참여, 레퍼토리 체제의 도입 등 높은 수준의 프로페셔널리즘 구현을 통해 공연예술의 선진화를 견인했다.

서울발레단은 한국 최초의 직업발레단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신무용가 조택원은 서울발레단의 창단공연에 즈음하여 “조선인도 발레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인식시켜 준 공연”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한동인을 일컫어 “아카데미즘의 첫 시도자이자 무용 기업화의 시도자이며, 나아가 본격 발레운동의 주창자”라고 자리매김한 조동화의 평가에서 그의 무용사적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서울발레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창작무용극 ‘인어공주’는 서울발레단 제5회 정기공연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다. 1950년 6월 24~26일까지 3일간 시공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둘째 날 전쟁 발발로 공연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다. 전쟁으로 인한 공연중단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에 속한다.

한동인은 당시 사회를 과도기이자 건설기로 규정하고 문화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무용계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모방기를 벗어나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적 문화의식의 소유자 한동인의 현실인식은 이처럼 예리했다. 남다른 시대의식과 무용예술의 진보를 꿈꾼 한동인의 선구자적 면모는 몇 가지 당면과제로 피력된다.

예컨대 국립무용학교 설립을 통해 무용인재를 양성할 것, 각 학교에 무용전담교사를 배치하여 무용교육의 전문화를 꽤할 것 등을 주장했다. 한동인이 제시한 당면과제는 반세기가 지났으나 한국 무용계에선 매우 더디게 성취되었거나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한동인이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 ‘춘향전’의 안무를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작품은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어 화제를 모았다. 그가 무용뿐만 아니라 인접예술 장르의 창조작업에도 적극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국립극장 개관과 더불어 한동인이 창설한 서울발레단을 국립극장 전속발레단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그만큼 전문직업단체로서 서울발레단의 위상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아쉽게도 서울발레단의 ‘국립화’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발레계의 인적자원 빈곤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발레 유망주 정지수의 월북도 치명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지수는 타고난 신체와 천부적 재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파로 통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나 1948년 경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밖에 월북무용가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함귀봉이 있다. 일본에서 아동무용과 교육무용을 전공한 그는 1946년 조선교육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무용교육의 전문화에 힘썼다. 무용이론과 실기, 무대과목 등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교과목으로 짜여진 교육내용은 오늘날 대학 무용과의 커리큘럼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한편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당시 문교부 승인을 받은 최초의 공식 무용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선진적 무용교육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월북함으로써 무용교육의 공적(公的) 제도화는 좌초되고 만다.

무용가의 월북은 대체로 해방직후부터 6·25전쟁 시기에 이루어졌다. 북행한 무용가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중진이거나 현실의식이 투철한 젊은 세대로서 미래가 촉망되는 기대주였다. 그들은 격동의 시기에 식민지 잔재청산과 새조선무용건설을 표방하며 한국무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요동치는 시대환경에서 실력파 무용가들 대부분이 월북했고 국내 무용계는 공백에 처하게 된다. 이렇듯 무용가들의 월북은 한국무용계에 큰 손실을 안겨줬다. 한국무용의 중심 축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겨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북으로 간 무용가들은 북한무용 초기 토대형성에 기여하면서 무용계 전면에 등장한다. 최승희는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조선인민회의대의원, 무용가동맹위원장, 인민배우 등의 칭호를 받으며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남편 안막의 몰락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1969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월북 후 조택원의 제자 이석예와 결혼한 정지수는 국립예술극장무용단 소속으로 활동했으나 부르조아 근성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비판받는 처지에 놓여진다. 한동인은 인민군협주단에 소속되었으나 1963년 이후 활동이 뜸해졌다. 함남도립가무단에서 안무자로 활동한 장추화는 말년에 딸과 함께 평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설이 있었다.

가장 극적인 인물은 바로 함귀봉이다. 그는 월북 초기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무용교사를 지냈으나 후일 최승희를 비판하는 악역을 맡게 된다. 당의 의도에 따라 최승희의 친일무용 행위를 규탄했으나 그 자신 역시 부르조아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1960년대 중반 사라졌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를 통해 한국무용계의 지형변화를 주도한 함귀봉이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선배 무용가 최승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것은 실로 아이로니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월북 초기 비교적 화려했던 행적과 달리 월북무용가 대부분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1970년대 주체문예이론에 토대한 이른바 피바다식 혁명무용극시대로 전환되면서 월북무용가 대부분은 북한무용계 중심에서 사라졌다.

주지하다시피 8·15해방 이후 민족 최대의 현안은 근대 자주국가 수립이었다. 그러나 좌우익의 정치적 이념대립은 두 개의 체제를 낳았고, 이후 남북은 분단고착화 상태로 70여년의 세월을 견디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반공이데올로기 체제에서 월북무용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오랜 시간 유보돼 왔다.

생각해보건대, 월북(越北) 또는 납북(拉北)이라는 용어 사용도 조심스럽다. 무용가들의 북행이 자유의지에 따른 스스로의 선택인지(월북), 타자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납북)에 따라 북행 동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북이든, 납북이든 그들이 모두 격동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바야흐로 통일을 전망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화해와 상생,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변곡점에 와 있다. 월북무용가에 대한 접근 역시 해방공간에서 6·25전쟁, 나아가 북한에서의 활동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민족사적 관점이 필요하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유연한 태도로 접근할 때 비로소 월북(납북) 무용가에 대한 온전한 복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북으로 간 무용가’를 소환하여 곱씹어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기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