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표현의 자유의 경계는 어디일까
[장석류의 예술로(路)] 표현의 자유의 경계는 어디일까
  •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 승인 2020.06.0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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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공적 재원이 들어간 예술 사업에서 표현의 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라는 주제로 문화부, 문화예술위원회, 국립극장, 국립극단 등에 소속되어 있는 행정인, 기획인, 예술인 20여명과 심층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에 대해 대다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의 가치 위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가치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범위를 확대하여 문화부와 서울시 문화본부를 포함한 16개 문화예술조직에 종사하는 233명에게 ‘표현의 자유’와 ‘국가주의’가 충돌할 때, 현실에서 어떤 힘이 더 반영되는지 물었다. 그 결과, 당위적으로는 예술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주의가 훨씬 강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인지부조화가 나타났다. 당위와 현실에 대한 인지부조화가 크다는 것은 의사결정과 판단을 하는 당사자의 내적 갈등이 크다는 의미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과 살아가는 세상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 블랙리스트 사건을 직접적으로 겪은 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그 차이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

연구에 참여했던 국립극장 기획인의 답변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표현의 자유에서 권력에 대한 풍자는 불가능하죠. 국공립이니까. 사실 주관적으로는 국공립이기 때문에 훨씬 사회를 반영해야 하고 사회비판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동물적으로 '아 이거는 안되겠구나'가 트레이닝이 됐어요." 국가브랜드 공연시리즈는 있어도 우리시대의 부조리와 갈등, 정치행정에 대한 풍자를 자유로이 드러낼 수 있는 국공립극장과 예술단체가 있을까? 우리나라 예술행정은 표현의 자유보다 국가주의의 눈치를 보며 현실에서 무리가 없는 적절한 '표현의 관리'를 내재화하고 있었다. '정착된 사회규칙(settled social rule)'으로 말이다.

표현의 관리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불편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 소위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 국립극단의 <개구리>,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벨> 등 공적재원이 들어간 사업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을 올렸다는 사실에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권을 침해하려 했다. 예술은 사실과 상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첨예한 것들을 읽어내고 진실을 드러내려는 성향이 있다. 때로는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방법과 태도가 불편하거나 동의가 안 될 수도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억압된 의견 안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또는 부분적인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예술은 정치행정과 보색의 긴장관계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의 변화에 따라 ‘표현의 관리’가 내재화 되어 있는 행정이 예술을 만나게 되면, 예술의 지평은 획일화되고 좁아질 것이다. 영화 <기생충>과 BTS의 시작은 국가행정과 맞닿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무한대여도 되는 것일까? 표현의 자유가 헌법적 가치 안에서 갖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여기에는 '명백,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라는 기준을 참고할 수 있다. 이는 1919년 솅크(Schenck)판결에서 미국의 홈즈 대법관이 처음으로 내세운 원칙으로, '실질적 해악을 초래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발생시키는 표현은 법률에 따라 규제의 대상이 된다'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유명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보호하더라도 극장에서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소리쳐 공황상태를 가져오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례를 들었다. 이 원칙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헌법에 합치하는가를 심사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령 연극 <이 아이>가 즉각적이고 명백하게 현존하는 사회적 해악을 가져왔는지를 질문해보면 된다. 그렇지 않은데 배제했다면 위헌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지난 5월 20일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끝내 20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특히 <예술인권리보장법> 제2장은 '예술표현의 자유보장'을 통해 행정이 예술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국가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했는지 예술인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21대 국회에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민주공화국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표현의 자유는 나의 기본권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기본권이기도 하다.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표현의 자유는 ‘자유’를 넘어 표현의 ‘성찰’을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직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표현의 관리’가 권력에 대한 눈치보기라면, ‘표현의 성찰‘은 세대, 이념, 성별, 계급, 지역 등이 다른 상대가 존재함을 감각하는 것이다. 내가 다수일 때도 있지만 소수일 때도 있다. 예술표현의 자유가 <예술인 권리보장법>의 토대 위에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세상으로 가는 기본권이 되었으면 한다.

 *'장석류의 예술로(路)는 예술인과 기획자, 행정인들간의 문화예술을 대하는 간극을 필자의 성균관대 박사 논문인 『문화행정의 가치충돌에 관한 실증연구』(2020)를 토대로 쉽게 풀어낸 글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