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남화연과 최승희의 만남-아카이브 전시와 퍼포먼스
[이근수의 무용평론]남화연과 최승희의 만남-아카이브 전시와 퍼포먼스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0.06.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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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최승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신무용의 태두, 1930년대 세계를 풍미한 반도의 무희, 근년에 해금된 월북무용가, 북에서의 숙청과 58세의 이른 죽음...명성에 비해 그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빛바랜 사진이 몇 장, 일본에 남은 짤막한 평론 글과 신문기사, 그녀가 남긴 편지 몇 장...논문들이 간혹 쓰여 졌지만 부족한 자료에 의존하다보니 작품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행적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미디어 작가 남화연에게는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기록의 부재가 창작의 동기가 된다는 점과 최승희의 궤적이 역사를 반영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그녀는 말한다. 2012년 페스티벌 봄이 주최한 다원예술축제에 ‘이태리의 정원’을 선보인 것이 최승희에 대한 남화연 몰입작업의 시작인 듯하다. ‘마음의 흐름’ 전(2014, 아르코예술자료원),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의 ‘반도의 무희’ 영상과 ‘이태리의 정원’설치 전(2019) 등에 이어 올 해 개최된 전시 퍼포먼스인 ‘마음의 흐름’(3.24~5.10, 아트선재센터 2, 3층)은 사진, 영상, 조각, 기록, 퍼포먼스를 망라한 최승희 아카이브의 종합 판이었다. 

작품은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보여진다. 2층엔 두 개의 작품이 있다. 전시장 바닥에 비스듬한 모양으로 깔린 부정형 4각형인 설치작품 ‘마음의 흐름’과 한 쪽 벽을 가득 채운 채 연이어진 대형 스크린 4개로 구성된 영상작품인 ‘사물보다 큰’이다. 영상의 주제는 바다다. 파도가 일고 해변이 있고 수평선 위에 하늘이 있다. 바다는 시간의 흐름이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교차하며 시간이 만들어지고 그 시간 가운데 사람들은 존재한다. 불란서 화가 꾸르베의 바다 그림, 남화연의 일본친구가 보낸 메시지들, 그리고 최승희의 기록이 나타난다. 바다를 건너 유럽에서 미국으로, 다시 미국에서 유럽으로 동양의 무희로 서양 무용계에 새겨진 최승희의 시간은 바쁘게 흐른다. 

“육지여행보다 바다여행은 늘 재밌고 로맨틱한 거라 생각합니다. 1938년 12월 26일. 트랜스아틀랜틱회사의 파리호로 뉴욕으로부터 프랑스 루브르 항에 도착. 허리에 손을 얹고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우아한 옷을 입고 우뚝 서 있었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분 좋은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해보여....”영상과 함께 흘러가는 최승희의 회상과 독백이다.

‘사물보다 큰’은 지구의 날줄과 씨줄을 안무재료로 삼아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남화연과 최승희의 만남이다. 남화연이 10년에 걸쳐 수집한 자료의 결과물은 물론이고 수집과정 또한 아카이브를 구성한다. 3층 전시장은 두 개의 칸막이로 나누어진 평면공간 4개와 5개의 벽면으로 구성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등신대 크기의 스크린이 놓여 있고 최승희의 초기작품인 ‘세레나데’(1936) 영상이 권령은의 춤으로 연속 상영된다. 군데군데 5개의 크고 작은 스크린이 자리 잡고 있다. 각각 ‘자오선’, ‘습작’(1935), ‘칠석의 밤’(1941), ‘풍랑을 뚫고’ 등 최승희의 작품과 그녀와 관련된 영상물을 보여준다. 공간을 둘러싼 벽면과 삼각형으로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에는 최승희를 다룬 신문과 잡지 기사들, 공연 팸플릿, 최승희가 쓴 편지와 공연에 대한 평론들이 모아져 있다. 전통적 형식의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공간 곳곳에 전통춤사위를 묘사한 손바닥크기의 조각품들은 퍼포먼스와 함께 남화연 전시의 특색이다(그녀는 코넬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최승희의 첫 안무작품인 ‘에헤라 노아라’(1935, 15분)가 정지혜의 퍼포먼스로 보여진다. 16세 때 이시이 바쿠를 따라 도일한 최승희의 일본 데뷔작인데 한복에 갓을 쓴 초립동 의상의 당시공연사진이 한 쪽 벽을 장식한다.

정지혜는 긴 머리에 검정색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었다. 이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현대무용가다. 전시장 가운데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독백과 멘트를 쏟아낸다. 설국(雪國)으로 유명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최승희론, 한성준에게서 전통무용을 배웠던 최승희의 내력, 그녀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기억들이 대사로 정리되고 김재리에 의한 드라마 트루기로 보여진다.

최승희 춤을 재현하면서 내레이션을 통한 아카이브를 추가하는 두 가지 목적의 퍼포먼스엔 원작의 의상을 구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남화연의 전시를 보면서 1936년 최승희가 콜롬비아레코드에 육성으로 취입한 ‘이태리의 정원’,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정원/어서 와주세요.”란 가사를 떠올린다. 남화연의 그리움, 우리들 모두의 그리움이 언젠가 북에 남긴 최승희의 작품들을 발견함으로써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