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팬데믹이 가져다 준 것들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팬데믹이 가져다 준 것들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6.1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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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연초에 불거진 팬데믹(pandemic) 상황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대유행병을 의미하는 이 외래어가 익숙한 생활용어로 자리잡은 지도 꽤 되었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병이 던진 충격파는 전염병 특유의 군중심리를 자극해 전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으며 급격히 사회생활을 위축시켰다. 다행히 국가의 방역시스템이 신속히 가동되면서 최선의 예방책으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전국민이 이에 부응하면서 큰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보도에 의하면 북경에서 다시 전염병이 번지는 등 세계의 동향이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코로나를 둘러싼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사회 각 분야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몇달전부터 대부분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문을 닫거나 부분 개방, 혹은 사전 예약제 실시 등 이에 대응하는 여러 구체적 방안들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하는 관람일정과 방법 때문에 적잖은 수의 관람객들이 혼선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가상공간에서의 사이버 전시다. 일종의 미디어 아트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형식은 웹 기반의 전시로써 시각을 통해 미적 체험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거의 유사한 효과를 낳는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소더비와 같은 세계적인 옥션회사들이 온라인 경매를 통해 높은 액수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은 홍콩바젤을 연기하면서 온라인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도록 '뷰잉룸'을 개설했다.

문제는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처럼 행사준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국제행사들이다. 비엔날레가 격년제고 트리엔날레는 3년마다 열리는 행사다. 카셀도큐멘타는 5년에 한 번씩,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무려 10년에 한 번 열린다. 이런 장기 행사들은 준비 기간이 긴 것도 문제려니와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이동해야 하는 만큼 무엇보다 전염병의 전파에 따른 방역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성격상 예측할 수 없는 팬데믹의 상황은 이런 류의 행사 개최에 절대적으로 불안정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차제에 세계 최대의 비엔날레인 베니스비엔날레가 2022년으로 연기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국내의 광주비엔날레가 연기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도 1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부산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창원조각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대전비엔날레 등은 예정대로 열린다.

그러나 예정대로 열린다고는 했지만 지금도 확진자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책 마련에 부산하다. 상황의 추이에 따라 가동할 대응 매뉴얼 작성이 필수고 보니, 이건 축복받은 축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전쟁터가 될 판이다.

▲SoSo,《떠도는 꽃들/Floating Flowers》, color pen on paper, 2020.6.12(도판=윤진섭 제공)

이런 사정은 비단 미술계뿐만이 아니다. 정부를 비롯하여 기업, 학계  및 각종 사회단체들이 벌이는, 행사 준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들은 모두 불안 요인을 떠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올림픽 연기 사례에서 보듯이,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인류의 대제전인 올림픽이나 월드컵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전대미문의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는 이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거시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안이한 수준에서 마련한 미봉책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인류에게 당면한 과제는 무엇보다 생태에의 관심이다.

이제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의 게임과 그 폐해에서 벗어나 우주적 관점에서 인류의 상생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생각하는 근원으로의 회귀를 성찰해야할 시점이다. 이러한 차에 현재 서구사회에서 일고 있는 노예상 로버트 밀리건과 콜럼버스 등등 구제국주의 선봉장들의 동상 철거 움직임은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볼 때 인류 스스로가 행하는 , 아담 스미스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동서양 평탄작업의 일환으로 읽혀진다. '역사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명제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이런 세계사적 차원의 대전환과 변혁을 보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