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옛 기록으로 보는 서산의 공연문화유산
[성기숙의 문화읽기]옛 기록으로 보는 서산의 공연문화유산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6.1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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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부른다. 북쪽에는 결성, 해미가 있고 서쪽에는 큰 포구 하나를 건너 안면도가 있다. 세 고을이 가야산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또 북편에는 태안, 서산이 있다. 강화와 남북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擇里志)』의 한 구절이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가야산 자락 언저리의 여러 고을을 한데 묶어 내포(內浦)라 한다. 내포란, 포구가 내륙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충청남도 서북부의 서산, 태안, 홍성, 당진, 보령, 예산 등을 일컫는다. 

내포의 서해안은 일찍이 해안 교통망이 발달하여 해로운송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고려시대 강진, 부안의 가마터에서 생산된 청자를 고려의 왕실과 귀족이 있는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받드시 서산, 태안 인근의 바닷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다. 서산의 해안교통망은 대륙과 연결되어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가 유입되는 중요한 루트였다. 

서산은 마한 56개 속국 중 하나인 치리국에서 비롯됐다. 백제시대는 기군(欺君)이라 불렸다. 신라 755년(경덕왕 14년)에 부성군(富城郡)으로 편제되었다. 부성은 옛날 당나라로 가는 대표적 항구였다. 당나라 유학파로 최고의 엘리트였던 최치원(崔致遠은 857~ ) 또한 내포의 뱃길을 따라 중국을 오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8년 12세 때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당나라 ‘황소의 난’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29세에 귀국하여 당나라 서적을 정리하여 왕에게 바치는 한림학사의 업무를 맡았다. 

최치원이 남긴 절구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는 한국전통공연예술사에서 낯익은 기록에 속한다. 여기엔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 다섯 가지 기예가 전하는데, 흔히 신라오기(新羅五伎)라 불린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라오기를 한국 전통연희의 원류로 해석한다. 반면 신라오기가 단순히 한반도 내 존재했다기 보다는 실크로드를 넘어 서역에서 전래된 산악·백희에서 영향 받았다는,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 접근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당대 최고의 문화지성 최치원은 어떤 배경에서 「향악잡영오수」를 지었을까? 우선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파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삼국시대 당나라는 선진국으로 인식되었고 신라의 귀족 자제들은 앞다투어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의 동해안 일대 주요 도시에 이른바 신라방(新羅坊)의 설치될 정도로 신라사람들의 수요가 넘쳐났다. 신라방은 신라인 집단거주지역으로 일종의 자치구를 의미한다. 

최치원은 당나라 체류시절 서역계통의 연희물을 자주 접했을 것이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향악잡영오수」를 지은 게 아닌가 싶다. 태생이나 활동내력에서 볼 때 최치원은 신라와 연관지어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가 서산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진성여왕 때 부성군 태수를 지냈다.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서산시 지곡면과 대산읍 일대를 일컫는다. 또 최치원이 하정사(賀正使)라는 직책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7년간 재임했다는 기록도 있다. 

예로부터 서산은 바다 건너 중국과 접경한 지역으로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서산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분류됐다. 국제적 마인드를 지닌 당나라 유학파 최치원이 부성군 태수로 발탁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라왕실의 대외정책에 따른 전략적 판단의 결과로 보인다.  

오늘날 서산에는 최치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선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는 부성산성을 비롯 그가 집무를 보았던 관아터 등이 대표적이다. 옛 서산땅, 즉 부성의 다운타운에 해당하는 지곡면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당 부성사(富城祠)가 있다. 최씨문중과 지역민들은 이곳에서 매년 제향을 올리는 등 최치원 기리기에 정성을 쏟는다.  

당대 대학자이자 관료였던 최치원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은 또 있다. 그는 서산시내 북쪽 옥녀봉 자락에 위치한 서광사에서 글공부를 즐겨했다고 한다. 또 가야산 강당골에서 고을의 학동들을 불러 모아 글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여러 흔적에서 최치원이 남긴 「향악잡영오수」 속 전통연희의 서산 착근성을 점쳐보게 된다. 

내포지역을 폭넓게 감싸고 있는 서산의 가야산은 옛 문사(文士)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명산으로 손색이 없었다. 18세기 유생 예헌(例軒) 이철환(李喆煥 1722~1779)이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상산삼매(象山三昧)』는 더없이 소중한 기록이다. 그는 조선의 유가적 전통에서 예사롭지 않은 족적을 남긴 성호 이익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산 운산의 보원사지에서 확인되듯 가야산은 불교문화의 성지로 통한다. 가야산에는 한때 약 100여개의 사찰이 존재했다고 전한다. 이철환은 1753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1월까지 약 4개월 동안 가야산을 유람하고 그 감흥을 기록으로 남겼다. 가야산의 명칭이라든가 봉우리의 생김새 등 산의 경관을 비롯 사찰에서 연행되는 공연에 대한 감상의 소회를 글에 담았다. 특히 가야산 일락사와 정수암에서 승려들이 연행한 음악연주, 꼭두각시놀이 그리고 각종 연희에 대한 기록은 전문가적 심미안을 능가한다. 

그의 기록에 등장하는 17세의 두 사미승 회잠(會岑)과 여옥(呂玉)의 단아한 외모와 잔잔한 음악연주 그리고 정중동적 몸짓이 눈에 잡힐 듯 하다. 거문고와 퉁소, 풀피리 등 교묘(巧妙)한 연주솜씨가 유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싶다. 일찍이 서산 일락사는 중고제 명창들의 학습장으로 유명했다. 해미 출신 방만춘은 11세 때 일락사에 들어가 10여년의 세월을 소리공부에 매진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방만춘의 소리제는 그의 아들 방진관으로 대물림되어 중고제 소리의 한 줄기를 형성했다.  

중고제 판소리에서 서산에 토대한 심정순 가(家)는 실로 기념비적이다. 그의 집안은 부친 심팔록을 축으로 5대에 걸쳐 무려 7명에 달하는 전통예인을 배출한 국악 명문가로 손꼽힌다.  중고제 판소리 명인 심정순은 20세기 초반 가야금병창 명인으로 활동하며 판소리 개작운동에도 앞장섰다. 특히 그는 1912년 『매일신보』에 이해조 산정으로 판소리 사설을 연재하여 주목을 끌었다.  

『매일신보』에 연재된 심정순의 판소리 사설은 강상련(심청가), 연의각(흥보가), 토의간(수궁가) 등 세 편이다. 고전문학 형식의 판소리가 근대적 출판 매체인 신문지면에 활자화됨으로서 판소리문화의 새로운 유통방식을 견인했다. 나아가 ‘듣는 판소리’에서 ‘읽는 판소리’로의 변이도 주목된다.

당시엔 심정순의 판소리 사설이 신문에 연재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슈였다. 판소리 산정자 이해조가 차지하는 위상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계와 언론계의 실력자로 20세기 초 한국 문화계를 쥐락펴락한 인물이다. 이해조가 산정한 심정순 판소리 사설의 『매일신보』 연재는 오늘날 국악학은 물론 판소리학, 국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가치롭게 읽히고 있다.

재론하자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보듯 서산은 지정학적, 인문지리적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다. 가야산 인근의 ‘내포지방’으로서 고유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내포문화권은 금강문화권, 백제문화권과 더불어 충청도의 3대 문화권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서민문화, 충의문화, 내포교회 등을 내포문화의 정체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 서산·홍성을 중심으로 한 중고제 전통가무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공연문화유산에 대한 주목도도 높아졌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서산이 이토록 유서 깊은 공연문화가 존재했는지 말이다. 앞서 언급한 옛 기록 속 잔해가 오늘날 내포문화권 전통가무악의 문화유전자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은 것 아닐까? 신라의 최치원과 조선의 이철환 그리고 20세기 초 이해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남긴 공연기록은 시공을 초월하여 내포문화권에 전승되고 있는 민속예능 및 중고제 소리문화의 기원과 전승내력을 되짚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롭다. 역사 속 문사들이 남긴 공연기록을 통해 서산의 민속예능 및 소리문화에 깃든 문화유산적 가치를 음미해본다. 옛 기록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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