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피아니스트 김예지와 슈베르트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피아니스트 김예지와 슈베르트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06.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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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곡 Bb장조, 인생의 사계절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씨가 즐겨 인용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고규홍씨는 17년 동안 나무를 연구하고 글을 써 왔다. 나무는 말없이 자라면서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쌓아간다. 고규홍씨는 사람이 나무를 만나려면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나무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어떤 시련을 겪어왔고 앞으로 어떤 시련을 이겨내야 할까. 상상력을 발휘하며 나무를 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을 그는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예지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피아니스트 김예지씨는 앞을 볼 수 없다. 너무 어릴 적에 시각장애인이 됐기 때문에 특별히 불행한 느낌도 없다. 피아노가 없었다면 그는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점자 악보를 구해서 연습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피아노가 있어서 그는 행복하다. 예지씨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귀국 연주회를 앞두고 있다. 안내견 찬미는 험한 거리에서 그의 눈이 되어 준다. 예지씨에게 나무는 거리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규홍씨와 함께 나무 여행을 떠나 모르는 꽃과 나무를 배워 가면서 그의 삶은 한층 풍요로워졌다. 나무의 촉감, 향기, 생명력은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슈베르트 음악으로 피어났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 EBS 다큐프라임 <슈베르트와 나무>(연출 양진용·김동현)에서 펼쳐진다. 고규홍씨와 김예지씨는 함께 나무를 발견하고, 나무를 통해 슈베르트를 듣고, 삶의 진실과 경이에 눈뜬다. 미세먼지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고 혐오표현과 가짜뉴스가 세상을 황폐하게 만드는 요즘, 이 다큐멘터리에 담긴 푸른 나무의 숨결과 슈베르트의 향기가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EBS 다큐프라임 <슈베르트와 나무> 

예지씨는 새소리와 바람소리로 나무의 위치를 알아낸다. 새가 지저귀는 곳에 나뭇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뭇잎의 서늘한 호흡 때문에 나무가 있는 곳은 온도가 조금 낮다. 불어오는 바람 중간 어딘가에 바람이 약한 지점이 있는데, 바로 거기 나무가 있다. 향기와 촉감은 나무의 언어다. 나무는 흙냄새와 어우러진 향기로 다가온다. 목련은 한약 냄새를, 백송은 어릴 적 추억의 냄새를 담고 있다. 포도나무, 단풍나무, 아까시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열매는 모두 나름의 촉감으로 말을 걸어온다. 예지씨의 손길에 능소화와 자귀나무는 수줍은 느낌으로 대답하고, 느티나무는 우툴두툴한 줄기로 투박하게 인사한다. 길게 늘어진 가지의 끝자락은 나무의 영역을 표시한다. 미국 원산의 니사 나무는 참 친절한 나무 같다. 나무의 품 안으로 들어가니 더위가 싹 가신다. 두 팔로 안아 보니 딱 한 아름인데. 느티나무처럼 울퉁불퉁하지만 따뜻하고 아늑하다. 

오래 된 나무는 삶의 희노애락, 그 모든 것을 말없이 증언한다. 예지씨는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나고 한참 일하다가 은퇴해서 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무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삶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인간의 삶, 나무의 삶을 연관 지어서 곡을 해석하고 연습할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돼요.” 슈베르트 연주회를 앞두고 있는 예지씨에게 나무의 생명은 음악으로 되살아났다. 그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A장조 소나타 D.664는 놀랍도록 맑고 신선하다(다큐 링크 39:18). 초기 자본주의가 낳은 혼탁하고 피곤한 경쟁사회에서 내면으로 망명한 슈베르트, 그가 일상에서 발견한 소박한 위안…. 언제나 곁에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친근한 이 아름다움을 우리는 왜 잊고 사는 것일까. 

1819년, 22살의 슈베르트는 손위 친구인 바리톤 포글과 함께 북부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지방을 여행했다. 슈베르트는 이 여행 중에 피아노 오중주곡 <송어>와 이 맑디맑은 A장조 소나타를 작곡했다. 슈베르트는 “즐거운 음악이란 걸 모른다”고 말했지만 젊은 피가 끓고 미지의 삶에 가슴 설렌 그가 어찌 즐거움을 전혀 모를 수 있을까? 가곡 <음악에게>로 노래했듯, 삶의 잔인한 현실은 언제나 그를 옥죄었지만 음악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따뜻한 사랑의 불을 지펴주고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다. 슬픈 ‘방랑자 의식’이 언제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슈베르트지만, ‘방랑자 의식’도 때로는 즐거운 빛을 띄어야만 살 수 있었다. A장조 소나타는 한번 들으면 바로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일상의 노래다. 북부 오스트리아의 숲을 산책하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슈베르트는 “나도 가끔은 즐거운 음악을 쓸 수 있다”고 속삭이며 이 곡을 작곡하지 않았을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A장조 D.664 (피아노 빌헬름 켐프)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 2악장 안단테 - 3악장 알레그로)

예지씨에게 이 소나타는 일상의 위안으로 다가온다. “나무에게 뿌리가 있다면 제겐 피아노가 있어요. 단단한 나무처럼 살고 싶어요. 피아노 건반이 나무라는 사실이 신기해요. 평생 나무를 만지며 살아온 셈이니까요.” 고규홍씨는 예지씨를 통해 나무를 새롭게 발견한다. “우리는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으니까 더 자세히 보려 하지 않죠. 오래 보지도 않아요. 한번 보면 끝인 거죠. 하지만 예지씨는 만져보고 들어보고 향기도 맡아봅니다. 이런 성의 있는 과정을 통해 나무를 알아 가는 거죠. 저는 나무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예지씨한테 배운 이 감각을 가지고….” 

고규홍씨는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가 쓴 <클래식과 경제-베토벤의 가계부>는 위대한 작곡가들이 가혹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생계를 도모하며 예술에 헌신했는지 설명한다. 그는 슈베르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거장으로서는 너무나 짧은, 그러나 탄생시킨 작품의 양적 질적 성취도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생애를 슈베르트는 불같이 살았다. 육체의 고통, 죽음의 운명과 맞서 싸우던 그가 내놓은 작품들에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은 삶과 죽음의 영원한 아이러니로 남았다.”        

슈베르트(1797~1828)는 경제적으로 불우했다.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이 막을 내리고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가 들어선 유럽,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신흥 부르주아는 떠들썩한 왈츠와 유흥 음악에 탐닉했다. 슈베르트는 이러한 사회의 세속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내면의 깊은 오솔길을 걸었다. 이 고립감 속에서 그는 오히려 마음속의 황홀한 빛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곡을 쓴다. 한 곡을 완성하자마자 또 다른 곡에 착수한다.” 내면의 방랑자 슈베르트는 꿈과 음악에서 충만감을 맛보았다. 그는 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즐겁게 했고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면 두 손을 입에 대고 황홀해 하는 순박한 젊은이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속에 사랑을, 입술에 노래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은 언제나 그를 빗겨갔다. 무한경쟁와 승자독식의 시대,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슈베르트는 1816년 7월 17일의 일기에 썼다. “오늘 처음 작곡으로 돈을 벌었다. 칸타타 한 곡 작곡료로 100굴덴을 받았다.” 출판업자들은 언제나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었다. 대중에게 낯선 슈베르트에게 작곡료를 치르는 것은 출판업자들에게는 모험이었다.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그는 임시교사를 전전하며 푼돈을 벌어야 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작곡가들은 교회와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두 ‘자유 음악가’가 됐지만, 안정된 생계를 꾸리는 일은 오히려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슈베르트는 자기를 아끼는 친구들의 모임 ‘슈베르티아데’에서 행복했다. ‘슈베르티아데’의 친구들 중 요젭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천재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오선지를 사 주며 작곡을 격려했다. 프란츠 쇼버는 호탕한 문학청년으로, 어머니 소유의 집에 슈베르트가 머물 수 있게 해 주었고 오페라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대본을 써서 슈베르트와 함께 작업했다. 30살 연상인 바리톤 요한 포글은 1821년 <마왕>을 히트시켜 슈베르트를 널리 알렸다. 두 사람이 알게 되기 전, 14살 소년 슈베르트는 포글의 노래에 반해서 그가 출연하는 <피델리오> 티켓을 구하려고 교과서를 팔아버린 적이 있다. 슈베르트가 생전에 가곡 작곡가로 인정받은 것은 포글과 슈파운 등 친구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위대한 기악 작곡가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음악가는 오페라로 성공해야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지만, 그가 손 댄 오페라는 모두 실패했다. 그는 <피에라브라스> 등 17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5편을 무대에 올렸지만, 모두 인기가 없었다. 1815년부터 죽을 때까지 2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썼지만,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 있는 빈 음악계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악흥의 순간>, <방랑자 환상곡>, 즉흥곡 Gb장조, 듀오 환상곡 F단조 등 자유로운 형태의 피아노곡들은 시대정신을 소나타보다 잘 표현했지만 ‘슈베르티아데’에서 연주했을 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15곡으로 추정되는 현악사중주곡을 비롯, 수많은 실내악곡을 써서 슈베르티아데에서 연주했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822년, 매독에 걸린 해부터 슈베르트가 어느 정도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역설이다. 그는 여전히 무일푼이었다. 작곡료를 받기만 하면 친구들과 만찬을 벌여 모두 써 버리곤 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 3월 26일 처음 공개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빈 무직페라인에서 Eb장조 피아노 트리오, G장조 현악사중주곡, 가곡 <별>과 <어부의 노래> 등 그의 여덟 작품이 연주됐다. 이 연주회에서 그는 생전 처음 대중의 환호를 받았고, 800굴덴이라는 꽤 큰 돈을 벌었고, 비로소 자기 소유의 피아노를 장만할 수 있었다. 예술가 슈베르트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지상에서 너무나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쓴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발표됐다. 이 때문에 슈베르트는 ‘죽어서도 작곡하는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 1825년 작곡한 대교향곡 C장조도 생전에 연주할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서랍 속에 있다가 1838년 빈을 방문한 슈만이 발견,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듬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됐다. 1828년 9월에 작곡한 현악오중주곡 C장조는 20여년이 지난 1850년에야 초연됐다. 그가 남긴 피아노 소나타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 낭만 교향곡의 꽃 <미완성>을 서랍 속에 넣어 둔 것은 1822년 무렵이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신비로운 슬픔의 1악장, 세상의 번뇌를 초월한 듯 평화롭고 달콤한 2악장, 그리고 20마디까지 쓴 채 중단한 3악장…. 풍부한 화성과 조바꿈으로 섬세한 시정(詩情)을 담은 이 <미완성>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교향곡 중 가장 완성미가 높다는 평을 듣는다. 완성되지 못한 슈베르트의 삶처럼 신비의 수수께끼 속에 잠들어 있던 이 곡은 1865년에야 발견되어 빛을 보았다. 슈베르티아데의 한 친구는 훗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슈베르트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위대한 천재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