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인문학 알고리즘 톺아보기] 먹방: 스펙터클의 또 다른 스펙터클
[청년, 인문학 알고리즘 톺아보기] 먹방: 스펙터클의 또 다른 스펙터클
  • 윤지수 미술(문화)비평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 승인 2020.06.3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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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수(1992년 생)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나와 동양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특히, 동시대 문화 현상과 변화에 대한 관심이 많고 미술, 과학,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 관해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윤지수(1992년 생)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나와 '미술이론의 공부와 연구를 위해' 네델란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특히, 동시대 문화 현상과 변화에 대한 관심이 많고 미술, 과학,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 관해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스펙터클(spectacle)의 세계에서 살고있는 우리에게 도시 문명의 스펙터클은 일상성을 마비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a, 1931-1994)는 세계 최초로 도시 문명과 일상성의 관계에 주목하여 스펙터클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이미 시각적 이미지가 우리를 포획하여 현실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의 범유행(pandemic) 현상은 관계의 단절을 더 촉발해서 일상의 경험을 앗아가고 있다. 이에 따른 흥미로운, 어쩌면 조금은 각박하게 느껴질 현상들이 우리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식문화의 변화로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가장 특징적인 식문화 중 하나로 음식을 공유(share)하는 것을 꼽고 싶다. 여러 음식을 한 테이블에 놓고 나눠 먹는 우리의 음식문화는 서양 사람들이 음식을 각자의 플레이트에 넣고 즐기는 것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 음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시간의 공유를 의미 한다.

그러나 점점 1인 가구와 혼밥족이 늘어나면서 음식을 나눠 먹는 이 문화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또한, 현대인들은 도시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도 도시인에게 부과되는 책임(경제활동, 준법, 각종 납세의무 이행 등)을 다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일상과 단절하기를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빈틈을 채우는 것 중 하나가 먹방이 아닌가 한다. 음식을 먹는 방송을 일컫는 ‘먹방(Mukbang)’은 2009년 처음 등장해, 한국 문화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신조어로 자리 잡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류대열에 합류한 먹방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외로움과 관계의 단절에 있다고 본다.

한편, 흥미롭게도 미술사에서도 먹방 문화와 아주 닮은 요리 운동이 있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하나인 미래주의(Futurism)에서 있었던 요리 운동이 그것이다. 미래주의 요리 운동이 전개된 이 시기에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러시아 공산주의가 들어섰으며 자동차와 비행기의 출현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와 같은 미래주의자들은 당시 이탈리아 미술이 전통 예술의 가치와 조형 의식 때문에 퇴보됐다고 여겼다.

따라서, 마치 해프닝적인 행위를 통해 과거의 미적 취향과 예술 제작 과정을 깨부수고자 했다. 기계의 젊음, 운동감과 힘, 그리고 속도를 찬양하며 다이나미즘(dynamism)을 화면 안에 구현하게 되었고, 그 대안의 하나로 요리 운동도 나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오감을 자극하게 만드는 요리 운동이 발현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요리 퍼포먼스에서 주체자는 요리를 하고 이들이 제공한 다양한 요리는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다른 관객들에 의해 감각을 체험하는 요소로 이용되었다. 또한, 퍼포먼스의 공간은 오감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의 공간이 되었다. 관객 모두에게 중간중간 음악이나 시를 가미할 것을 독려했는데, 이는 퍼포먼스 안에서 취해야 할 행동과 순서의 지침을 주체자가 제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요리 운동이, 평소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과 도시 문명으로 인간에게 체화된 스펙터클을 중화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도 여겨진다.

이들은 약 100년 전 스펙터클의 초기 단계에 살 게 된 인간에게 요리 퍼포먼스를 통해 스펙터클로 흡입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알면서도 이를 거부하는 마지막 몸부림을 펼쳤던 것이다. 지금의 먹방과 어렴풋하게 맞닿은 지점이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미 스펙터클이 우리의 일상이 된 오늘. 건강한 음식을 즐기고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타인과 교류하는 시간을 우리는 그저 가상의 공간(화면)을 통해 소환하고 있다. 이는 스펙터클을 중화하기 위해 또 다른 스펙터클을 이용하는 것과 같다.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이 스펙터클의 떼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타인과의 소통이 어느 때보다 소중한 시점이며, 현대인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 역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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