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피아니스트 김예지와 슈베르트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피아니스트 김예지와 슈베르트Ⅱ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07.17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즉흥곡 Bb장조, 인생의 사계절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슈베르트 교향곡 8번 B단조 <미완성>

1827년 겨울, 30살을 넘긴 슈베르트는 마지막 창작의 불꽃을 태웠다. 존경하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슈베르트는 대중 앞에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층 더 참신하고 원숙한 작품을 내놓아야 했다. 슈베르트는 미친 듯이 연가곡 <겨울 여행>,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트리오, 현악 오중주곡 등 걸작들을 써내려갔다.

(필립 요르단 지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 2악장 안단테 콘 모토)

김예지씨는 이 걸작들 중 하나인 F단조 즉흥곡을 연주했고 고규홍씨는 직접 촬영한 나무 사진을 슬라이드로 만들어서 연주 무대의 배경 화면으로 선보였다. 예지씨가 연주한 F단조 즉흥곡은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 나무의 영상과 어우러져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다큐 링크 39:39). 불꽃과 열정으로 가득한 이 곡은 창작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겠다는 슈베르트의 결기를 들려준다. 이 무렵 그의 짧은 생애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는 건 슈베르트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슈베르트 즉흥곡 F단조 Op.142-1 (피아노 빌헬름 켐프)

고규홍씨는 힘들거나 지칠 때 800년 나이의 괴산 오가리 느티나무를 찾아오곤 한다. 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외할머니 치마폭에 안긴 듯한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치유된다. 예지씨도 이 나무를 찾았다. “여기엔 냄새, 향기, 소리만으로는 설명하기 버거운  세월의 무게가 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에서 위로를 받았을까요? 오래된 것, 커다란 것은 또 다른 영역 같아요. 오래된 나무는 좋은 연주를 닮았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예지씨는 인간의 삶과 나무의 삶을 연관지어서 슈베르트를 해석하고, 연습하고, 연주한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Bb장조 Op.142-3은 주제와 5개의 변주곡이다. 예지씨는 이 변주곡이 나무의 삶과 통한다고 설명한다(다큐 링크 30:45). 계절 따라 변하는 나무의 느낌을 실어서 잎사귀, 열매, 꽃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첫 변주는 봄의 새싹이 돋아나듯 작게 움직인다. 제2변주는 활기찬 기운이 대지를 녹색으로 물들이는 한여름이다. 제3변주는 무겁고 슬픈 느낌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듯 격정적이다. 제4변주는 조성이 바뀐다. 푸른 잎을 단풍으로 물들이는 나무처럼 싹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제5변주는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지막 부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서는 느낌으로 마무리한다.

슈베르트 즉흥곡 Bb장조 Op.142-3 (피아노 빌헬름 켐프)

인생의 사계절과 나무의 사계절은 결국 같은 게 아닐까? 겨우내 앙상한 가지로 찬바람에 맞서던 니사 나무는 이 5월이 되면 풍성한 잎사귀로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다. 8월이 오면 이 나무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여름의 더위를 넉넉하게 막아준다. 니사 나무는 지금 몇 번째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인생의 몇 번째 변주곡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한번 살다 갈 인생의 여행길,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사방에 가득하다. 음악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작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가난하던 시절, 슈베르트는 일기에 썼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는 그저 작곡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슈베르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그의 삶은 ‘미완성’으로 멈춰버린 듯하다. 하지만, 오래 살아야 더 온전한 삶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그의 짧은 삶도 엄연히 봄, 여름, 가을, 겨울 인생의 사계절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나이로 보면 그는 인생의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겨울 여행’을 자신의 존재, 그 숙명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상을 걸어가면서 그는 봄을 꿈꾸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28년 10월, 슈베르트는 가곡 <바위 위의 목동>에서 노래했다. “봄이 왔다. 봄, 나의 기쁨.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 D : ‘도이치 번호’로 불리는 ‘D’는, 1951년 슈베르트의 작품을 정리해서 목록을 만든 음악학자 오토 도이치의 이름에서 따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