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7.1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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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내가 한국의 퍼포먼스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것은 1971년 이었다. 당시 시골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독서신문이라는 주간지의 합본호에 실린 해프닝에 관한 기사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퍽 흥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제4집단이 행한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이란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은 1970년 8월 15일 정오에 서울의 사직공원에 모인 일단의 젊은 전위예술가들이 행한 도전적이며 저항적인 성격의 전위미술이었다.

해프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본론에서 개진하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나는 이제까지 해온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퍼포먼스 역사에 대해 서술할 생각인데, 그것은 내가 겪은 시대를 배경으로 나의 삶에 녹아든 체험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나의 취향이랄까 기질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나는 이상(李箱) 김해경(1910-1937)의 문학을 접하고 어렴풋이나마 전위예술에 대해 눈을 떴다. 나의 시골집 서가에는 큰 형수가 시집올 때 가져온 한국문학전집 중 한 권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상 김해경의 소설과 시가 실린 책이었다. 1920-30년대에 다다(Dada) 풍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문학을 추구한 이상은 한국문학사상 전위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나는 ‘오감도’를 비롯하여 ‘날개’로 대변되는 그의 시와 소설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접했다. 그리하여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글을 쓰는 한편,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에 있었던 나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왕치, 예술과 자본, 2014(도판=윤진섭 제공)

그 시기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본격적인 전위미술이 출범한 것으로 기록된 1967-8년 무렵이었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인 <가두시위>가 벌어진 1967년은 1961년에 5. 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이 민정이양기 (民政移讓期)를 거쳐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해였다.

나의 기억 속에 이 시기는 그 이전, 그러니까 1960년대 초반 박정희 군사정권이 행한, 화폐개혁과 같은 희미한 기억과 함께 선배들의 경험담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훗날 내가 성장하여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이벤트와 퍼포먼스를 직접 행할 때까지 약 10년간은 책을 통한 정보나 선배들의 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매개항>이라는 실험적인 사진작품으로 화단에 데뷔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퍼포먼스 역사는 나의 체험과 정보에 의한 기술(記述)이 가능하다. 즉,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작가적 경험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진시기획 경험, 그리고 1990년 이후의 비평가로서의 글쓰기 경험이 녹아든 한국 펴포먼스의 역사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하여 지금 전 세계가 떠들썩하다. 작년 10월에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포즈난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기생충> 포스타를 구해서 그 위에 드로잉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에 이 기생충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유년기에 한국의 어린이들은 횟배를 많이 알았는데, 이따금씩 마을 앞의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휘발유가 타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이 고소한 냄새를 좋아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뱃속에 든 회충이 그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천안 같은 도회지로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갔다. 그때 눈에 들어온 택시나 기차, 버스 등 각종 자동차들과 사각형 모양의 높은 빌딩들(빌딩이라야 4-5층에 불과했지만), 호화스런 쇼 윈도우 등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근대성(modernity)의 체험이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근대성의 전환은 1960년대에 비롯되었다. 1963년에 미터법 사용을 규정, 서서히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정부는 해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한국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이 미터법의 실시와 정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移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밥 한 번 먹을 동안에 걸어서 가는 거리’를 의미하는 ‘한 식경’에서 국제적 표준인 미터(m)와 킬로미터(km)로의 이행은 곧 근대적인 제도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적인 서구 행정제도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제도와 문물의 도입과 정착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해외 박사들의 공이 컸다. 당시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사회면에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을 작은 인물사진과 함께 소개하여 국민들의 교육열을 부추겼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무너트린 4.19혁명에 뒤이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에는 전후 피폐해진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5차에 걸쳐 추진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을 구심점으로 수출 100억불 달성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아젠다가 실행에 옮겨졌다. ‘무’동인과 ‘신전’동인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작가들이 [청년작가연립전]을 중심으로 해프닝을 발표한 1967년에는 대망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박정희에 의해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공표되었다.

1967년 12월 11일, 당시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에 참가한 작가들이 행한 <가두시위> 해프닝과 12월 14일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보수적인 사회에 전위예술의 새로움과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