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메세나) 수상자 인터뷰]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예술이 세상에 자유롭게 나오도록 이끌고 싶어”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메세나) 수상자 인터뷰]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예술이 세상에 자유롭게 나오도록 이끌고 싶어”
  • 인터뷰 정리/이은영 발행인, 진보연 기자
  • 승인 2020.07.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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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도움 필요한 곳 가치와 신념 보탤 것
김홍신 문학관 72억 쾌척, 김수환 일대기 다룬 영화 ‘저 산 너머’ 40억 등 투자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중략)/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시와 정치의 사이/정치와 경제의 사이/(중략)/관청과 학문의 사이를/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휴지와/권력과/돈과/(중략)/억압과/통계가/남을 뿐이다”

시인 김광규의 「생각의 사이」 일부이다. 그는 글을 통해 경제활동과 문학활동, 돈과 예술 사이에서 항상 고민하고 있음을 밝혔다. 인간의 아이덴티티와 화폐와 시간이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숫자의 교육이 문자의 습득보다 앞서야 한다고 흔히 믿는다. 그러나 예술인에게 있어서 숫자의 정확성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상징성일 것이다. 다만 예술만으로 숫자의 시대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행이도 예술가들이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그들의 세계를 좁혀나가지 않도록 돕는 후원의 손길이 존재하며, 이를 우리는 메세나(Mecenat)라 부른다.

메세나란 기업이 예술단체나 예술인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총칭하는 용어다. 메세나의 기원은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제국 아우구스트 황제의 대신이자 정치가, 외교관, 그리고 시인으로 활동했던 가이우스 마에케나스는 시성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마에케나스의 이름이 프랑스로 넘어가 ‘메세나’로 바뀌며 우리가 알고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최근에는 메세나의 의미가 더욱 확장되어 예술·문화·과학·스포츠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익사업에 대한 지원 등 기업의 모든 지원 활동을 포괄하고 있다. 창의력에 근간을 둔 문화예술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기업은 단순히 사회공헌 차원에서만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것이 아닌, 마케팅과조직문화 차원까지 그 활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도 ‘메세나’를 실천하고 있는 기업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5월 논산에 개관한 ‘김홍신문학관’에 72억 원을 쾌척했다. 거액을 아무 조건 없이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30억 원의 사재를 출연해 세운 재단에 이사장은커녕 이사로도 등재하지 않았다. 

문학관 후원 외에도 화가와 국악인 등에 후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최근 개봉했던 김수환 추기경 일대기를 담은 영화 <저 산 너머>에 40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이해타산 없는 통 큰 지원으로 문화예술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남상원 회장은, 마음 속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문장을 항상 지니고 있다고 전한다.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과정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만난 전세계의 선생들로부터 세상을 배웠던 그는, 그들에게 받은 많은 가르침과 신념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다시 세상으로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보태고 싶다는 남상원 회장을 아이디앤플래닝그룹㈜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11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메세나 분야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 소감과 수상 이후 근황이 궁금하다.
서울문화투데이에서 문화대상을 수상한 이후 문화예술 분야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됐다. 문화란 마음의 가장 안쪽에 있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 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맑아지지 않나. 사회에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문화 덕분에 메마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종종 인터뷰와 강의 요청을 받지만 대부분 고사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기엔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직은 소진하고 싶지 않다. 내 안에 좀 더 쌓이고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코로나19로 현재 영화 시장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 개봉한 ‘저 산 너머’가 예상대로 관객이 많지는 않지만 현재까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남상원 회장의 투자(쾌척)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작 과정과 작품을 관람한 소감이 듣고 싶다.
영화 <저 산 너머>는 투자부터 제작, 유통/배급까지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다. 보기도 많이 봤는데 8번까지는 볼 때마다 많이 울었다. <저 산 너머> 이전까지 나는 영화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영화에 투자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5개월이 넘게 코로나 19가 이어지면서, 영화 시장은 물론 전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만, 영화가 개봉하던 지난 4월 말부터 5월 초에는 확산세가 잠시 주춤하여 염려했던 것보다 많은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개봉하려면 약 8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6주 만에 개봉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큰 영화를 경쟁상대로 두진 않았지만, 작품에 만든 이의 취지가 잘 반영되었다고 생각해 만족한다.

영화를 만들어 갈수록 김수환 추기경이 나서서 <저 산 너머> 제작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난 건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신대 백장현 교수의 연락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지난해 1월 백 교수는 나에게 영화 투자를 제안했지만,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거절했었다. 그날 저녁 백 교수는 감독과 제작자와 함께 나를 찾아왔고,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영화의 원작이 된 정채봉 작가의 책이었다. 별생각 없이 펴든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가슴이 뛰었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확신이 들었다. 이익을 떠나, 이 영화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영화 ‘저 산 너머’ 스틸컷(사진=리틀빅픽처스)
▲영화 ‘저 산 너머’ 스틸컷(사진=리틀빅픽처스)

처음의 망설임이 무색하게도, 영화에 많은 애정을 쏟은 걸로 알고 있다
건설업에서 30여 년간 종사하다 보니, 본업의 행동력이 여기서도 나타났다. 설계하면서 공사를 거의 동시에 진행하는 ‘패스트트랙’ 방식을 영화 제작에 적용한 셈이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7년이란 기간 동안 표류했던 영화인만큼, 더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 11주기에 맞춰 선보이기 위해서는 1년 안에 완성해야만 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김수환 추기경이 하늘에서 내려준 ‘인연의 끈’을 내가 용케 잘 잡았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영화의 메인 촬영지 선정만 해도 그랬다. 논산은 내 고향인 동시에 김수환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익현의 출생지이다. 김 추기경이 나고 자란 대구, 경북 군위 등에서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감독과 제작자가 논산의 풍광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고, 영화의 주 무대가 됐다. 조선시대 논산 출신 정치가 사계 김장생 선생의 후손인 김 추기경의 여러 의미가 깃든 논산에서, 그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작업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촬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았지만, 제작진을 어렵게 설득해 집어넣은 장면이 딱 하나 있었다. 영화 속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익현이 우리나라 최초 신부 김대건의 강론을 듣는 대목이다. 김익현이 순교한 데는 김대건 신부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김대건 신부가 논산 강경에서 미사를 보던 17세 무렵, 김익현의 집안도 논산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에 이 두 사람의 만남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유추했다. 원래 책에는 없던 내용이다. 감독과 제작자를 13번 회의 끝에 설득했다.

최근 관심이 가는 분야나 장르, 혹은 눈여겨보는 작품이 있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영화 <저 산 너머>에 잠시나마 김대건 신부가 등장한다.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는 상해에서 1845년 조선으로 입국하여 선교 활동에 힘쓰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에 1846년 순교한다. 

김대건 신부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됐다. 정약용(2012)과 허준(2013)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이며, 한국 교회 성인(聖人)으로는 처음이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 전 세계에 한국 성인의 삶과 업적을 전하며 성인을 더욱 현양할 수 있게 됐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보다 16년이나 앞서서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영인본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는 남상원 회장. 지도에서 독도가 표기된 부분을 손으로 짚어 설명하고 있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보다 16년이나 앞서서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 영인본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는 남상원 회장. 지도에서 독도가 표기된 부분을 손으로 짚어 설명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조선전도’ 제작이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확하게 표기한 이 지도는, 김 신부가 1845년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들을 위해 만들었다. 1861년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보다 16년 먼저 탄생한 ‘조선전도’는 지명을 한국식 발음으로 로마자로 표기해 서구사회에 우리나라 지명을 소개한 첫 번째 지도다. 1855년에는 프랑스 지리학회보에 수록돼 6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전도’는 현재 국내에 없다. 원본으로 추정되는 조선전도는 1846년 리브와 신부에게 전해졌으며, 이 중 한 장이 중국 상하이 총영사 몽티니의 손을 거쳐 1855년 프랑스 왕립도서관에 기증돼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국내에는 최석우 신부가 1978년 입수한 지도 사본이 현재 한국순교자박물관과 독도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귀중한 역사 자료를 개인적으로도 보관하고 싶어, 파리국립도서관에 요청하여 사본을 받아 소장하고 있다.

25년이라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250년을 산 것과 같은 업적을 남긴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자 함은 <저 산 너머> 투자 당시와 비슷한 이유다. 종교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사랑을 실천했던 분의 삶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깊이 알고, 좀 더 닮아가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영화 투자 이전에 ‘김홍신 문학관’ 설립 기부가 있었고, 이외에도 여러 지원으로 문화예술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분야에 투자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어려서부터 정말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내가 가난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은 돈을 버는 것이라 여겼고 무작정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건설 업계로 들어오게 됐지만, 사실 원래 꿈은 선생님이었다. 방학 동안 책을 원하는 만큼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책을 많이 읽은 것은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을 현실에 적용했고, 책에서 느낀 감상은 정서로 자리 잡았다. 

삶에 많은 영향을 준 도산 안창호, 만해 한용운 등 여러 선생과의 만남도 모두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을 통해 받은 많은 가르침과 신념을 국가와 청년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한다.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누고, 베풀기 위해 채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김홍신 문학관’ 설립 당시, 기획전시‧교육‧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라키비움(larchiveum) 형태의 복합문화예술 공간을 목표로 했다.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고, 앞으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논산시 내동에 위치한 ‘김홍신 문학관’은 366평 규모의 문학관과 120평 규모의 집필관 2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필관에는 작가의 집필실을 비롯해 레지던시 창작공간과 세미나실, 수장고를 갖췄다. 문학관은 작가 일대기의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특별전시실을 비롯해 아카이브 전시실, 문학 전망대, 관람객을 위한 열린 다목적실과 카페로 구성돼 있다. 문학관 설계부터 자재, 채광, 조명 등 모든 공간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의 62억원을 쾌척해 설립한 김홍신문학관 전경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의 62억원을 쾌척해 설립한 김홍신문학관 전경

복합문화예술 공간 역할을 하고 싶다는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자연스레 지역민들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본적인 문학관의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예술을 하는 이들은 세미나실 등으로 장소 활용을 하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더불어 <저 산 너머>를 논산에서 찍게 되며 문학관은 촬영 본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고 싶다. 공간 활용 방식을 의도할 계획은 없다. 모든 것은 쓰는 사람의 것이지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의 투자/협찬을 방송·영화·예능 등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풍조가 자리 잡았다. 때문에 이해타산 없는 남상원 회장의 지원이 더욱 진정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내가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표현이 있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줄 때 내가 받으려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지럽고, ‘내가 남을 위해 베풀었다’는 생각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들보다 열 배, 스무 배의 노력하며 살았고 흘린 땀방울만큼 꿈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내 자리를 찾아가면서부터는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여건이 되는 시기에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와준 덕분에 꿈을 이뤄가는 중이다.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인터뷰 모습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 인터뷰 모습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싶은가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부침이 있는 지점들이 당연히 생긴다. 일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도, 너무 바빠 달력의 빨간 날들을 몇 년간 그냥 보냈을 때에도 힘든 점은 항상 있었다. 서둘러 가다 보니 그만큼 실패도 빠르게 왔다. 많은 경험을 통해 그럴수록 원칙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김홍신 작가는 현재 김홍신문학관에서 백제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당나라에 의해 사라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역사를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백제가 왜 중요했는지, 왜 멸망했는지, 왜 일본이 백제를 배웠는지 등 스토리텔링이 아닌 역사성에 주안점을 두는 작품이 될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그것을 이루는 구성을 알고, 그들이 이뤄낸 문화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길목을 지나며, 나는 시대를 너무 바쁘게 지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의 속도는 주위를 둘러보는 일을 통해 늦추는 중이다. 누군가를 돕는 것에 정확한 기준을 세우진 않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의 가치와 신념을 보탤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