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프리뷰] 뮤지컬 ‘펀홈’, 앨리슨 벡델이 지은 기억의 집
[공연프리뷰] 뮤지컬 ‘펀홈’, 앨리슨 벡델이 지은 기억의 집
  • 진보연 기자ㆍ유해강 대학생 인턴기자
  • 승인 2020.07.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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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 테스트 창시자, 앨리슨 벡델의 자전적 작품
아버지와 딸의 관계 속 ‘퀴어’한 정체성 찾기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ㆍ유해강 대학생 인턴기자]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이 얼마나 성 편향적인가를 지적할 때 종종 언급되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항목이다. 

벡델 테스트의 창시자 앨리슨 벡델은 페미니스트이자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며, 자전적 그래픽 노블 <Fun Home(펀홈)>을 쓴 여성 예술가다. 

▲뮤지컬 ‘펀홈’ 공연 모습(사진=달컴퍼니)
▲뮤지컬 ‘펀홈’ 공연 모습(사진=달컴퍼니)

2006년 발표된 그래픽 노블 <펀홈>은 뮤지컬 <펀홈>의 원작으로, 앨리슨 벡델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가족 내 퀴어 정체성 계보 추적 과정을 그린다.

뮤지컬 <펀홈>의 박용호 프로듀서는 “이 작품은 앨리슨 벡델의 기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상 극”이라며 “기승전결이 없는 전개지만,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자살한 아버지를 회상하며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 인생을 돌아본다는 의미가 있다”라고 소개했다. 

<펀홈>의 원작은 만화(코믹스)나 소설이 아닌 ‘그래픽 노블’로 분류된다. 이는 그림만큼 철학적이고 은유적인 해설의 비중이 큰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해설을 어떻게 무대에 녹이느냐는 뮤지컬 창작진들의 중요한 숙제였을 것이다.  

뮤지컬 <펀홈>은 극 중 43세 앨리슨의 대사 “캡션, 설명: 아빠와 난 닮은 곳이 하나도 없다” 등을 통해 앨리슨이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과거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배우 최유하의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극 중 무대에서 회상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43세의 앨리슨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실제 ‘앨리슨 벡델’을 모티브로 한다. 뮤지컬 <펀홈>은 작가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든 것이다.

43세 앨리슨 벡델을 연기하는 최유하는 “누군가와 호흡하지 않고 상대방 없이 연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라며 “기억과 멀어지고 싶은 인물이 결국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극에서는 앨리슨 벡델의 기억이 가장 정확한 사실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초반에 시연된 ‘다 기억나’와 ‘메이플 에비뉴에 있는 우리집’은 아버지와 비롯된 앨리슨의 첫 번째 기억을 보여준다. 앨리슨은 정적이고 세련된 성향이던 자신의 아버지 브루스 벡델과 그가 사랑한 골동품을 떠올리는 한편, 그의 옆에서 비행기 타는 놀이를 하고 싶다며 소리치던 9세 앨리슨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항상 완벽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던 브루스 때문에 앨리슨, 남동생 존과 오빠 크리스찬, 그리고 어머니 헬렌은 늘 이상적인 가족을 연기해야 했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류수화는 자신이 맡은 헬렌에 대해 “앨리슨의 기억 속 파편이며,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그는 “앨리슨이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주가 아니며,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하는 작품”이라며 “관객들도 그럴 수 있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앨리슨은 여러 면에서 아버지를 자신과 정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 아버지와 수없이 갈등했고 그만큼 그의 사랑을 열망했다.

브루스 벡델을 맡은 최재웅은 “(평소와 달리) 대본이나 캐릭터 분석보다는 역할 표현에 집중했다”라며 “브루스 벡델은 앨리슨의 기억에 의해 표현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필터를 한 번 걸쳐) 그렇게 보이게끔 표현하려 했다”라고 연기에 관해 설명했다.

▲배우 이주순과 최재웅의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같은 역을 맡은 성두섭은 “‘앨리슨 벡델’의 아버지처럼 보이고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며 “극이 하나의 큰 스토리로 연결된 게 아니라 조각별로 나뉘어서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브루스가 가진 섬세함, 히스테리, 불안감 등에 집중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시연곡 ‘괜찮아’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았던 순간을 비춘다. 영문학과 교수인 브루스 벡델의 밑에서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으며 자란 앨리슨은 대학에서 느낀 실망감을 바탕으로 둘만의 유대감을 발견하고, ‘괜찮아(not too bad)’라고 표현한다. 

브루스 벡델이 운영하는 장례식장에서 뛰어놀며 부르는 앨리슨, 존, 크리스찬의 ‘펀홈으로 와’는 죽음과 놀이가 공존하는 장면이다. 작품의 제목인 <Fun Home>이 사실은 <Funeral Home(장례식장)>의 약자임을 떠올리게 한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9세 앨리슨은 자라며 브루스에게 위화감을 느끼는데 이는 아버지가 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의 레인코트’, ‘포니걸’ 속 앨리슨의 회상에서 브루스는 동네 청년인 로이, 뉴욕의 선원들, 장례식장을 찾은 친구 등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아버지가 게이임을 확실히 아는 성인 앨리슨의 일방적인 상상일 수 있다. 

<펀홈>의 박소영 연출은 “이 작품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서사 위주의 진행 방식이 아니라 보는 이들에 따라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라며 “그러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앨리슨 벡델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배우 유시현의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마지막 시연 장면인 ‘열쇠고리’는 9세 앨리슨 벡델이 ‘틀리지 않고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깨닫는 순간을 보여준다. 9세 앨리슨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향을 받아들이는 이 장면은, 실제 작품에서 앨리슨 벡델이 ‘부치’ 여성을 보고 느낀 오묘한 거부감과는 상반되게 연출됐다. 

아직까지 여자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과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공연 시장에서, 앨리슨 벡델은 확실히 눈에 띄는 캐릭터다. 

최유하는 “(레즈비언 여성이 주인공인) 이런 극이 특이해 보이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라며 “여자, 남자 한정 짓지 않고 다양한 연기 했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내비쳤다.

최유하와 함께 43세 앨리슨을 연기하는 배우 방진의는 캐릭터에 대해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된 가운데 귀한 역할을 맡게 됐다”라며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작품이 다양하게 만들어져 후배들도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뮤지컬 ‘펀홈’ 프레스콜 시연 모습

박 연출은 “<펀홈>의 소재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이것도 결국 마음의 여정이고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라며 “앨리슨 벡델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극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뮤지컬 <펀홈>은 오는 10월 11일까지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