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설익은 형평
[장석류의 예술로(路)] 설익은 형평
  •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 승인 2020.08.0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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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좋은 음식도 하나만 지나치게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 이번 정부는 아직은 설익고 뜸을 덜 들인 공정과 형평을 우리사회에 지나치게 우겨 넣으면서 소화불량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전에는 ‘승자독식’, ‘적자생존’, ‘선택과 집중’의 효율의 가치를 많이 먹어서, 위가 헐었었다. 하지만 기다렸던 민주라는 문양이 새겨진 접시위에 올려놓은 ‘형평’을 먹어보려 쓱싹쓱싹 썰어보니 탁한 색의 단면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꿀꺽 먹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아프다. 자세히 보니 상한 형평을 먹고 있었다. 부강한 나라도 중요하고, 공정한 나라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나라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공정과 형평. 어디서든 환영받을 가치이고 누구도 그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치를 배제한 채 형평만을 강조하다 목적을 상실한다면 그 형평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 진행했던 문화행정 연구에서 형평의 가치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연구에 참여한 문화부, 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등에 있는 상위 의사결정권자들은 현실에서 적용되는 형평의 단면을 이렇게 드러냈다.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저울이 형평과 공정 쪽으로 확 치우쳤어요. 그런데 형식적인 형평과 공정성만 따져요. 누가 심사하면 정확하게 하겠다 안 따지고 난 안 골라. 뺑뺑이 돌려 나오면 관계없는 분야의 전문가여도 그냥 연락을 해요”, “공평, 형평, 이러한 가치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현실에서 공평은 튀지 않음, 중간만 가. 그런데 모든 걸 똑같이 나눠주지 않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근거나 원칙이 너무 많이 필요해요”, “일이 될 수 있는 방향보다 욕을 덜 먹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어요. 방어적이기만 하죠.”, “형평성을 판단하는 것은 외부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에 넘겨야해요. 담당자는 그냥 제 3자 관점에서 일을 하죠. 내 것이 아닌거에요.” 

형식적이기만 한 형평,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형평으로 인해 형평의 판단 자체를 외주화하는 현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한 형평의 문제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가로저으며 특혜를 주지 않았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형평에 대한 책무를 지지 않은 것이다. 형(衡)은 저울대를 의미한다. 저울의 균형점은 규칙과 기준을 상징한다. 사심없이 규칙을 동등하게 적용하고,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하는 조절의 관점도 가지고 있다. 기계적으로 나누는 평등이 아닌 공정하고 온당하게 저울이 움직여야 한다. 정의로운 형평은 합당한 차등에서 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과 불평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동등한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합당한 평등이고, 동등하지 않은 사람을 동등하지 않게 대우하는 것은 합당한 불평등이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극작가A는 이렇게 얘기했다. “지원을 할 때, 떡잎이 보이잖아요. 떡잎 키우는 작업을 평등적 관점에서 하는 건 아니라는거죠. 그게 특혜와 애매한거에요. 여기서 기획자, 행정직원의 책무성이 발동해야 해요. 이건 책임지고 가는거에요.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들에서 자신이 없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신뢰, 해당 기관에 대한 신뢰, 신뢰를 잃어버린거죠. 누가 뭘 심사해도 믿지 않잖아요.” 이런 현상은 블랙리스트를 겪으면서 우리가 치르는 대가일 것이다. 담당자의 자율적 판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시간을 지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행정 계좌에 적립된 신뢰 자산은 얼마나 될까? 신뢰가 바탕이 된 진척된 민주주의에서는 선택된 소수에 대해 집중지원을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믿고 지지하며 갈 수 있을 것이다. 민주는 매혹적이다. 하지만 기계적 형평에 갇힌 민주는 가까운 미래에 그 생명을 다할 수 있다. 상해버린 형평의 힘은 스스로 합리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자율의 발목을 잡고 효율도 책무도 차례로 주저앉게 할 수 있다. 

적절한 형평 적용을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비례적인 지원과 적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차이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에 대한 개념 설계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형평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을 힐끗 보며, 적절성을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기에 충분한 논의와 시간을 갖고 다양한 상황에 맞게 조절해가며 형평을 숙성시켜 가야 한다. 문화행정에서도 형평성 원리를 적용하기 위한 ‘차이의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고, 차이에 따른 비례를 적용한 ‘평가와 분배에 대한 사례’들을 쌓아가며 공유할 필요가 있다. 평가자가 막힘없는 설명책임으로 쓴 판단의 기준은 살아남을 것이고 좋지 않은 판단의 기준도 논의의 숙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효율과 형평은 충돌하는 양자택일의 모순되는 가치만은 아니다. 합당한 형평이 이루어져야 합리적인 효율이 달성된다. 건강한 나라는 중용의 상태이다. 모자라지도, 지나쳐서도 안 된다. 중용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자 중 하나가 밝을 명(明)이다. 명(明)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보면, 일(日)과 월(月)이 만나 밝음을 이룬다. 하루 종일 해만 떠 있거나, 달만 떠 있다면 사는게 힘들 것이다. 형평이 없는 효율은 삭막하고, 효율이 없는 형평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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