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예술가의 聖所, 명륜동 거장의 옛집
[성기숙의 문화읽기] 예술가의 聖所, 명륜동 거장의 옛집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8.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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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맘먹고 무용가 자료정리에 나섰다. 이화여대 무용과 창설자 박외선 선생의 자료상자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춘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외선 뿐만 아니라 근현대 한국을 빛낸 문단의 거장 두 분의 흔적이 함께 담겨있기 때문이다. 남편인 아동문학가 마해송과 그의 아들인 시인 마종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박외선은 1915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마산여고 3학년 때 최승희 춤에 매료되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남산자락 서빙고동에 있던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문하여 춤을 배운지 1주일 만에 무대에 섰다. 천재라는 찬사를 받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스승 최승희가 써준 추천장을 들고 홀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신무용가 최승희의 추천으로 다카다 세이코의 제자로 입문한다. 최승희, 조택원을 비롯 당시 조선의 무용지망생 대부분이 이시이 바쿠 문하에 입문한 것과 비교하면 다소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다카다 세이코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무용가로 명성이 있었다. 박외선은 무용체득과 동시에 일본문화학원 불문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도 열중했다. 세계예술의 중심이 파리로 인식되던 시절 불어를 배우는 것이 예술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어문계열의 학습과 인문학적 소양은 그의 예술활동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1937년 제국의 심장 동경 한복판에서 선보인 ‘압박받는 사람에게 영광 있으라’는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의식을 일깨운 작품으로 조선유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줬다. 「청포도」의 작가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전통과 민족성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자한 소회가 엿보인다.

무용가 박외선의 선구자적 행보는 차고 넘친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하여 발레를 체득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또 1960년대 초반 미국 마사그레이엄 현대무용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1963년 이화여대 무용과 개설은 기념비적 업적에 속한다. 이는 한국 최초의 대학 무용과 창설로 기록된다. 이화여대 체육과에 출강하던 시절 김활란 총장께 수차례 무용과 설립의 필요성을 건의한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였다. 춤아카데미즘화를 통해 무용의 지성화를 견인했고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척도를 바꿔놓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한국무용사는 박외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국내 최초의 무용이론서인 『무용개론』을 비롯 여러 권의 저서 집필을 통해 무용의 학문적 토대를 닦았다. 이화여대 무용과에서 수학한 춤아카데미즘 제1세대 무용가 대부분 그의 문하를 거쳤다. 그들 중 다수는 대학 무용과 교수가 되거나 안무가로 성장했다. 한국무용계의 리더로서 무용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데 공을 세웠다.  

박외선의 예술세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남편 마해송과 사별의 슬픔을 묘사한 ‘고별’은 탁월한 주제의식으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김수영 시인의 「풀」을 소재로 한 ‘대지의 무리들’은 다채로운 군무의 형식미를 통해 인체미학의 진수를 발휘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시와 춤의 경계가 허물어져 완전히 하나로 통섭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이다.

그의 작품엔 시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이는 그의 가족사와도 무관치 않다. 알다시피 박외선의 남편은 아동문학가이자 근대 최고의 문화지성 마해송 선생이다. 최초의 찬미적 창작동화로 일컫어지는 「바위나라와 아기별」(1923)을 비롯 「떡배 단배」, 「모래알 고금」 등이 있다. 한국 아동문학의 개척자로 이름이 높다.  

황해도 개성의 양반가 출신인 마해송은 중앙보고를 거쳐 보성고보 재학 중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했다. 일본 문단의 권위자 기쿠지 캉(菊地寬)의 문하생으로 『문예춘추』 초대편집장을 거쳐 『모던일본』 사장을 지냈다. 문화대중지 『모던일본』은 매달 7,80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자연스럽게 마해송 역시 일본문화계를 호령하는 최고 실력자로 통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 일본 사람이 아니면 사람노릇도 못하던 그 시절에 일본 수도 동경에서 한국 사람이 잡지를 발간하고 일본 대중들이 제일 많이 사서 본다는 사실이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는 언론인 김을한의 회고에서 그의 존재론적 위상을 새삼 반추한다. 

1937년 무용가 박외선과 『모던일본』 사장 마해송의 결혼은 하나의 사건으로 회자된다. 둘 사이를 맺어준 이가 신무용가 조택원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조택원이 자신의 공연 홍보를 위해 출연자인 박외선을 대동하고 『모던일본』 사(社)를 찾은 것이 인연이 됐다. 박외선의 청초하고 단아한 분위기, 지성적 외모에 매료된 마해송은 그 자리에서 청혼할 것을 결심한다. 

구애는 성공했고 1939년 첫 아들 마종기가 태어났다. 당시 산고의 고통과 모성애가 담긴 유아일기를 『삼천리』에 연재해 관심을 끌었다. 마종기는 재미의사이자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99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소아방사선과 전문의가 됐다. 문우(文友) 황동규, 김영태와 『평균율』을 출간한 이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그 나라 하늘빛』, 『하늘의 맨살』 등 주옥같은 시집 여러 편을 남겼다. 맑고 투명한 시어(詩語)에서 그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143의 3번지. 무용가 박외선의 옛집 주소다. 동시에 아동문학가 마해송과 시인 마종기의 집이기도 하다. 명륜동 성균관대 초입에서 왼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사방이 3,4층 빌라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작은 한옥 한 채가 눈에 띈다. 외로운 섬처럼... 그러나 굳세게 버티고 서 있다. 

“이 낡은 집만은 천운으로 옛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대학 시절 종기의 방에서 좁은 마당 맞은편 건넛방의 마 선생님이 작은 반상 앞에서 원고를 쓰시던 단정한 자세를 훔쳐보기도 한 이 작은 집이야말로 우리 아동문학, 무용예술, 시문학이 어울린, 초라하지만 아름다운 ‘예술가의 집’이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칼럼 「시인들의 옛집」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명륜동에 있는 박외선· 마해송·마종기의 옛집은 무용계와 문학계의 거장을 키워낸 예술가의 성소(聖所)와 다름없다. 무용가 박외선은 이 집에서 저녁식사 중 영감이 떠오르면 무용 포즈를 취해보며 식사를 포기하고 안무에 열중했단다.

마종기 시인의 작품은 일종의 중독성이 있다. 시 「박꽃」은 특히 그렇다. 그의 시작(詩作)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에 묘사된 시 탄생배경과 추억담을 읽노라면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건넛집 지붕에 피어난 흰 박꽃을 감상하며 눈물짓던 아버지를 회상한 시인 아들은 이국에서 명륜동 옛집을 떠올리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시인에게도 명륜동 옛집은 기억의 저장고이자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세 분의 예술계 거장의 체취가 스며있는 명륜동 옛집은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미래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다.     

수년 전 마종기 시인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함께 종로구청에 들러 명륜동 옛집의 살릴 길을 문의했었다. 뾰족한 수가 없다는 답변에 낙담해 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또 2017년 6월 어느 날 한국아동문학협회장을 지낸 조대현 선생과 서울시 문화정책 담당자와 만나 명륜동 옛집의 보존방안에 대해 면담했던 기억도 새롭다. 결과는 모두 헛수고였다. 명륜동 예술가의 옛집의 존재와 그 가치를 알린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언젠가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명륜동 근처에 가면 꼭 시인의 옛집을 찾아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 말이다. 김병익 선생의 언급처럼 “그 낡고 작은 옛집의 기억에서 아름다움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이고 오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