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태국에서 만난 나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태국에서 만난 나
  • 윤영채 밀레니엄 키즈
  • 승인 2020.08.13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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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요즘 같은 여름 날씨엔 태국에 가고 싶다. 나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해외 여행지는 태국이었다. 2018년 드디어 고3, 열아홉 살이 된 나는 매우 들떠있었다. 수험생이라는 것은 모두가 주목하고 배려해주는 위치이자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모험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그런 내게 3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올 것을 제안하셨다. 3, 한시가 급한데 말이다.

  작은언니는 당시 연말연시를 기해 동남아 장기 여행 중이었고 마침 태국에 머물고 있어서, 그녀와 합류하기로 하고, 선택했던 것이 나의 첫 태국 여행이었다. 그렇게 201811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태국행 비행기에 홀로 올랐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나는 이상 기류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내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 딱딱하고 좁은 의자에 앉아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가 두 손을 꼭 잡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장장 6시간을 견디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수완나품 국제공항(Suvarnabhumi Airport)에 내려서 군고구마처럼 까맣게 탄 작은 언니를 만나기까지 내 속도 두려움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자매는 해를 넘긴 3개월 만에 한국도 일본도 중국도 아닌 태국에서 재회했다. 호텔이 아닌 호스텔로 이끌려간 나는 처음으로 남녀 공동 숙소에서 묵게 되었는데, 아침엔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은 놔두고 거주자들이 많이 간다는 낡은 한 식당에서 모닝글로리 볶음과 팟타이를 먹었다. 택시가 아닌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여러 사원을 구경하기도 하고, 발가락 사이가 다 벗겨지도록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중간에 돈 문제로 싸우기도 하고 태국 남단에 있는 코사무이 섬에서 스콜을 만나 죽을 뻔하기도 했다. 언니와 지지고 볶고 싸울 때마다 왜 그리도 집이 그리운지. 친구들과 마주 보며 떡볶이를 먹던 순간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려 밤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또 걷고 또 걸으며 여행을 했다.

  어느덧 67일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홀로 그 섬에서 방콕으로 또 방콕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언니를 남겨둔 채 함께 묶었던 해변의 한 호스텔에서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겨 나오면서 참 많이 울었던 게 생각난다. 다투기만 했던 여정이었지만 왜 이제야 전날 저녁에 먹었던 풋팟퐁커리(얇고 부드러운 껍데기를 가진 게를 튀긴 후 카레, 코코넛 밀크 그리고 채소를 볶아서 만드는 태국 전통 음식)의 맛이 떠오르는지, 언니와 함께 스콜 속에서 툭툭이(삼륜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개방형 택시)를 잡던 순간이 기억나는지. 혼자 배를 타고 태국의 한 시골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오줌을 참으며 식은땀을 흘렸던 것도. 그곳에서 국내선을 타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 서울에 오기까지의 모든 순간이. 그사이 마주쳤던 수많은 인생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의 첫 태국은 그녀에 대해 애틋함과 고된 여행이 남긴 추억 그리고 넓은 세상에 대한 경외심과 이유 모를 짜릿함이 섞인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나는 태국에서의 기억을 뒤로하고 비로소 고3이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의 직장이 부산으로 옮겨갔고, 엄마도 직장 내 스트레스로 사표를 던지고 아빠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 작은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면 슈퍼에서 장을 보고 다음 날 먹을 밥을 지어놓은 뒤 우울함에 새벽 1시까지 동네를 걷다가 돌아와 간신히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벽 6시면 눈을 뜨고 또 학교에 갔고, 음 뭐랄까.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기분.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절절하게 그리웠다. 내 주변엔 두 언니와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엄마 아빠를 결코 대신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버틸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는 태국에서의 첫 풋팟퐁커리의 맛과, 사원 근처의 한 박물관에서 언니와 나란히 누워 쐤던 시원한 바람이 이유 없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대학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도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머나먼 땅에서 다시 나의 고향으로 거슬러오기 위해 거쳤던 꼬박 하루가 있었기에. 그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재수를 결심하고 나는 또 한 번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의 기억은 더더욱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밖은 비가 내리는 무더운 여름이다. 이런 날이면 태국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