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의 조명 이야기]한강의 기적
[백지혜의 조명 이야기]한강의 기적
  •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 승인 2020.08.2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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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서울시좋은빛위원회 위원

길고 지루했던 장마가 끝나간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남긴 장마였지만 단 한가지 좋았던 건 비 온 후 맑고 공기 아래 깨끗하게 드러난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내려 모든 것을 씻어내고서야 드러난 서울의 모습은 여러 해 동안 계속 쌓였던 매연과 먼지로 색과 질감이 왜곡되어 보여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연일 미세먼지와 마른장마 소식에 도시가 청정해질 기회가 없었다. 

지난 주말, 지방에 다녀오느라 김포공항에 내려서 평소와 같이 올림픽대로를 들어서며 눈에 들어온 서울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한강과 주변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배경처럼,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 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오전까지 비가 내려 한강물은 수위가 많이 올라와 있었지만, 대기는 투명하고 건물이나 가로수, 심지어 평소에 검게만 보였던 산까지 선명한 어둠속에 나름의 색이 반영된 다양한 회색을 띠어 입체감을 더해 멀고 가까움의 깊이가 강조되어 보였다. 대기에 아직 습기가 남아있을 밥 한데 건너편 강변북로의 가로등은 빛퍼짐 없이 명쾌한 반짝거림으로 강의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강다리의 조명마저 도로나 다리의 형태와 색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아! 아름다운 야경이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순히 대기의 질이 달라졌다고 이렇게 다르게 보이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신비한 현상의 원인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이 더해져 있었다. 

먼저, 차량의 불빛. 구간 구간 통제되었던 올림픽대로에 교통량이 현저히 줄어 자동차의 움직이는 헤드라이트의 수가 평소와 달라 늘 차량불빛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한강 다리 하나하나의 모습과 그것을 비추고 있는 빛의 효과가 그림 마냥 눈에 명확하게 들어왔다.

그 다음은, 한강. 불어난 강물은 탁해지고 흐름이 빨라져 평소에 고스란히 담아내던 주변 아파트의 불빛, 한강 시민공원의 불빛들이 수면 위에 확산되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평소에 주변에 과밀한 빛요소로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투영하여 곱절이 된 한강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정온해져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하면서 런던의 템즈강이나, 파리의 세느강 주변에서 경관적으로 우리 한강변과는 너무도 다름을 발견하고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특히 야간 모습에 대하여 혹독한 평을 한다. 

세느강의 주변은 고풍스러운 건축물 혹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매우 조화로운 경관조명이 계획되어 있다. 강변에 빼곡이 들어선 아파트의 조명과는 사뭇 다르며 주변의 가로등도 그 높이나 빛의 색이 고풍스러운 도시의 모습과 잘 어우러진다. 세느강의 야경을 아름답게 하는 데에 다리의 조명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거의 30개에 육박하는데 하나하나의 형태미가 매우 뛰어나 강물에 투영된 다리의 모습이 그 아름다움을 더하게 한다.

런던의 템즈강 주변은 건축여행자들에게 꼭 가야할 것으로 꼽힐 만큼 특징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미술관에서 모던스타일의 밀레니엄 브릿지 그리고 포스트 모던 스타일의 런던시청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건물들의 경관조명 역시 건축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도록 다양하게 계획되어 있어 주간에 보는 이미지 만큼이나 다이나믹함을 느낄 수 있다.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역시 30여 개에 이르고 유명한 타워브릿지나 밀레니엄 브릿지에서 알 수 있듯이 다리 하나하나 형태미가 뛰어나다. 이 템즈강의 다리들의 조명계획은, 몇 번 언급한 바 있는데, 일루미네이티드 리버라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를 통하여 예술조명이 입혀지고 있는데 작년 1단계 4개의 다리가 조명을 켰고 향후 모든 다리들의 조명을 하나의 마스터 플래닝 안에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어져 결과적으로 한강 다리의 조명과는 다르게 보여질 것이다.

한강이라는 경관자원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으로 특히 서울과 같이 많은 기능과 과밀한 주택 , 인구 모든 면에서 밀도가 높은 거대도시의 경우 시각적으로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도시민들에게 물리적,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마 전의 한강이 장마 후의 한강과 다르게 보이는 데에 다양한 원인이 있었던 것 처럼 한강이 있는 서울과 세느강이 흐르는 파리 그리고 템즈강이 흐르는 런던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데에도 수많은 경관적 다름이 관여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원인으로 꼽는 주변의 건물, 도로와 같은 물리적 경관요소와 도시 조명의 질적 특성 뿐 아니라 대기의 질, 건물의 오염도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게다가 강의 수질에 따라 모든 경관요소를 얼마나 어떻게 투영하는가에 따라 강의 주변이 그리고 그 도시의 모습이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세느강이나 템즈강보다 수질이 좋은 한강이 강변에 줄지어 선 아파트의 불빛을, 강변가로를 따라 달리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고스란히 투영하는 바람에, 서울은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많은 빛이 담긴 도시의 오명을 갖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비로 도시가 깨끗해진 이 때, 선명하게 드러난 서울의 야경을 즐겨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