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린 2,000여 점 그림 중 요체 담아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나의 자아는 두 가닥의 회로를 따라 교차하면서 자라난 듯하다. 자연과 우주, 사회와 역사로 향하는 두 가닥의 회로. 그 둘이 바람 속에 얽혀 있듯이, 그것들을 그림 속에 녹이고 싶다. 그것들은 자아와 사물의 끊임없는 대화요,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일 뿐이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강요배가 평생 그려 온 2,000여 점의 그림과, 그림에 담긴 뜻을 표현해 온 수많은 글이 모여 책으로 탄생했다. 『풍경의 깊이』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강요배의 삶과 예술을 응축한 산문집이다.
강요배는 그림 작업이 ‘평평한 곳에 몸을 써서 마음을 나타내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책 역시 납작하고 압축된 공간이지만, 『풍경의 깊이』에는 그가 사람·역사·자연을 직면하는 뜨거운 마음, 그가 지닌 오랜 연륜의 흔적, 예술을 향한 깊은 사유의 향이 짙게 배어 있다.
화가 강요배는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을 기념해 소설가 현기영이 연재한 「바람 타는 섬」에 함께할 그림을 그리면서 주목받는다.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은 <동백꽃 지다>(1991)라는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이어지며, 강요배는 4·3 항쟁의 화가로 불리게 된다. 강요배를 필두로 의식 있는 작가와 시민, 유가족이 함께 노력하여 그 결실로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채택되었고 대량 학살에 대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동백꽃 지다> 이후 1992년 제주로 귀향하여 섬의 바람과 나무를 벗하며 그 땅에 새겨진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강요배 작품은 점차 깊어진다. 그는 작품의 방법론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기억과 시간을 응축한 ‘상’象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이른다. 그는 ‘추상’이 “애매모호하게 흐리거나 기하 도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사건’을, 어떤 기氣의 흐름을 추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핵심, 골격을 중시하며 명료화하는 것이 ‘추상’의 진정한 의미라고 주장한다. 동일한 작품 경향을 지속하거나 반복하는 작가도 많지만, 강요배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며 작품 세계를 변화시키고 발전해 가는 작가다.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그의 작품은 이제 아픔을 기억하는 데서 나아가 자연을 통한 치유를 고민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를 모색한다.
강요배는 이 책을 한 화가의 인생에서 펼쳐진, 생각의 여로가 투명 구슬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결과물이라 말한다. 이는 『풍경의 깊이』에 그림뿐 아니라 글로도 오롯이 담겨 있다. 작품을 그리는 시간보다 사유하는 시간이 더 길 때도 많다는 화가 강요배는 1년 또는 다년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그림만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더 확실히 하고자 글을 써 왔다고 한다.
『풍경의 깊이』는 화가 강요배가 지닌 마음의 풍경, 즉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을 따라가면서 이 땅에 새겨진 시간과 우리가 머무르는 자연을 음미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우주의 단독자로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마음의 무늬”를 그릴 수 있도록 이끈다. 『풍경의 깊이』는 자연과 역사, 민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삶과 세계를 응시하며 강렬한 필치로 미적 영감을 표현해 온 화가 강요배의 예술 세계를 보여 주는 글 모음이자 그림 모음이며, 사유의 모음이다. 더불어『풍경의 깊이』에는 사진가 노순택의 강요배 인터뷰도 담겨 있다.
한편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강요배는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한 민중미술 작가로, 제주 4·3항쟁을 다룬 '제주민중항쟁사' 연작 등으로 시대의 아픔을 그렸다. 1992년 제주로 귀향해서는 제주의 자연 풍경에 내면을 담아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380쪽, 정가 38,000원,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