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신민요춤’의 복원, 앞으론 레뷔(revue)가 돼야한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신민요춤’의 복원, 앞으론 레뷔(revue)가 돼야한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0.09.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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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그 많던 늴리리야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무용학자 최해리의 의문이다. ‘근대의 춤유산 - 신민요춤의 재발견‘(9. 13. 서울돈화문국악당)은 무용인류학적 시각에서 접근한 훌륭한 공연 콘텐츠다. 언제부턴가 무용계의 주류가 가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때로는 무시해 왔던 ’한국춤의 중요한 흐름‘을 매우 당당하게 ’무대무용‘에서 바라본 시각이 돋보인다.

1930년대의 배구자, 1960년대의 권려성, 두 무용가가 한국무용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들의 춤이 밑바탕에 깔린 노래가 ‘신민요’이다. 그들은 일찍이 ‘커뮤니티 댄스’의 가치를 알았고, 당시 사회구성원이 춤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방식을  제시했다.

음악인류학자는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가르지 않는다. 모든 음악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시각으로, 세상의 여러 음악을 바라본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삶, 그 생활방식과 음악문화를 연결해서 바라본다. 민족음악은 바로 이런 삶 속에서, ‘태동 성장 발전’을 거치게 된다.

무용도 마찬가지. 무용가의 시각에선 ‘승무’는 고급이고, ‘꼭두각시’는 저급일지 모르나, 무용인류학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반대의 시각일 수도 있다. 왜 ‘꼭두각시’는 어린이들이 춤을 추게 되었고, 그런 전통(흐름)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걸까?

대한민국의 무용계의 주류가 인정하는 한국의 전통춤은 한계가 분명하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승무 살풀이 태평무에 국한되어서, 한국의 전통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답답하고 위험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런 춤이 한국무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였을까?

식민지 조선에서, 유성기음반의 보급률이 점차 높아졌다. 특히 1930년대의 서울(경성)은, 매우 문화적인 도시였다. 공연문화가 활성화되었고, 거기서 무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꽤 높았다. 그 때 추었던 춤이 승무, 살풀이, 태평무였을까?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음악과 함께, 어떤 춤을 보면서 행복해했을까? 우리는 그간 특정시대의 춤을 너무 특정장르에만 국한시켰고, 특정인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제는 ‘근대’와 ‘시민’(대중)에 대해서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이를 통해 보편적 다수가 즐길 수 있는 동시대성의 공연콘텐츠가 필요하다.

‘신민요춤의 재발견’은 전통공연진흥재단의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의 하나였다. ‘전통예술의 복원’은 곧 ‘근대예술의 복원’이요, ‘근대공연문화’를 현재화시키는 작업이다. 1930년대 당시의 공연문화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수하다. 지금의 우리가 미처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그 시대의 그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공연콘텐츠가 많다. 왜 그럴까? 한국의 공연문화가 활성화되려면, ‘전통’과 ‘현대’ 사이에 매우 중요하게 존재하는 ‘근대’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근대춤’을 모르는 현대춤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요, 오로지 전통춤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건 좌정관천(坐井觀天)이다.

인접분야의 종사자로서, 늘 마음으로 안타까웠다. 무용역사기록학회에서 ‘근대의 춤유산 신민요춤의 재발견’은, 이제 한국의 근대문화 속에서 춤이 어떻게 존재했는가를 주목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예술감독은 김경숙(무용역사기록학회 회장), 제작감독은 최해리(한국춤문화자료원 이사장)가 맡았다. 신민요를 대표하는 세 곡이 등장했다. ‘천안삼거리’는 강주미가 안무와 출연한 홀춤(일인무)이었다. ‘늴리리야’의 안무는 김선정, ‘처녀총각’(양산도)의 안무는 남수정이었고, 각각 4인의 무용수가 출연을 했다.

세 편의 춤은 특히 1960년대에 크게 활약한 권려성의 춤을 기반으로 해서 충실히 ‘재현’하고, 세 명의 안무가가 이를 바탕으로 ‘재창작’했다. 따라서 각각 두 번씩 볼 수 있었다. 앞의 재현춤에선 당시의 ‘원곡’에 충실했고, 뒤의 재창작에선 이창훈 (아라한 대표)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공연에선 ‘신민요춤’과 연관된 유성기음원을 실제 감상하는 자리도 병행했다. 이 코너를 진행한 석지훈은 근대의 비(非)문자 자료에 특히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신문이나 잡지뿐만 아니라, 음원이나 영상 속에 존재하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석지훈은, 이번 공연을 학술적인 측면에서 더욱 빛냈다.

‘근대의 춤유산 - 신민요춤의 재발견’의 출발은, 대한민국 ‘근대문화’를 이 시대의 ‘극장공연’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참여한 모든 분이 다 위대해 보였다. 이제 여기서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제 근대 유성기음반의 음원을 더욱 확장시켜서 공연해야 한다.

중요한 한 사람이 강홍식 (1902 - 1971). 강홍식은 팔방미인이었다. 알려진대로 최승희, 조택원과 함께, 일본의 이시이바투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익혔다. 남북이 분단될 때, 북을 택한 강홍식은 영화배우, 영화감독으로 활약했다.

강홍식의 대표적인 ‘신민요’는 ‘조선타령’, ‘처녀총각’, ‘봄총각 봄처녀’. 1930년대 발표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고, 이런 노래에는 춤이 동반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봄이 왔네, 봄이 와’로 시작하는 ‘처녀총각’은 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일본인 奧山貞吉(오산정길, 오쿠야마_데이키치, 1887-1956)이 편곡했다. 1930년대, 노래와 춤, 연기와 재담이 모두 가능한 강홍식의 무대는 어떠했을까? 1930년대, 노래와 춤, 연기와 재담이 모두 가능한 강홍식의 무대는 어떠했을까? 지금 이 시대에, 강홍식과 비견될 사람은 누굴까?

‘신민요춤’을 통해서 ‘근대공연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시각이라면, 춤에만 국한되는 건 한계가 있다. 당시의 공연은 노래와 춤, 만담과 촌극이 함께 하였기에 이제는 이를 합쳐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당시 이런 형태의 공연은, ‘보편적 다수’가 좋아했고, 그 안에 우리의 ‘근원적 심성’이 담겨있다.

신민요춤의 매력은 무엇일까? 지금의 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신민요춤의 춤의 동작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춤에는 ‘연기’와 ‘표정’이 동반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용동작으로 일관하면 재미가 없다. 1960년대의 신민요춤과 연관된 영상에도, 무용수가 봄날 설레는 마음을 얼굴의 표정, 연기(연극)적인 동작으로 표현하는 걸 알 수 있다. 이번 ‘신민요춤’ 공연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이다. 1930년대의 배구자, 1960년대의 권려성은 각각 ‘악극단’과 ‘뮤지컬’ 형태의 공연을 해왔기에, 특히 춤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나야만이 ‘신민요춤’이 확실하게 부각될 수 있고, 다른 춤과 변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근대의 춤유산 - 신민요춤의 재발견’이 자료적인 접근, 학술적인 접근으로 성공했다면, 앞으론 보다더 공연적인 접근과 창작적인 접근해야 한다. 확실히 전제할 것은 노래와 춤, 코미디와 촌극이 공존하는 레뷔(revue) 형태다. 1930년대는 존재하였고, 1960년대까지도 그 모습을 살필 수 있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순수예술공연이건 대중지향 공연이건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일제강점기의 ‘배구자악극단’과 ‘오케이그랜드쇼(조선악극단)’의 공연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 때 공연이 지금보다 재밌다. 근대공연예술의 복원을 완벽하게 원한다면, 음악적, 무용적, 연극적, 만담(코미디)적 입장을 넘나들 필요가 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한국적 뮤지컬’이다. 레뷔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