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4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4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9.18 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Ⅵ.
90년대의 한국 퍼포먼스를 특징짓는 성격은 사적인 담론, 즉 내러티브의 강세와 에이즈를 비롯하여 신체, 젠더, 페미니즘, 홈리스 등과 같은 사회적 주제들과 관련된다. 이는 70년대의 독재정권 시기를 관류한 사회적 억압과 갈등이 해체되면서 집단에서 파편화된 개인으로 이행해 나가는 데 따른 일종의 과도기적 징후로 볼 수 있다.1)

또한 90년대의 퍼포먼스는 청각과 시각적 체험이 강조된 80년대의 퍼포먼스와는 달리, 그로테스크한 미감이나 나르시즘 등 극단적인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었다.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를 기해 홍대 앞에 있는 씨어터 제로에 한 무리의 행위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의 전역에서 온 약 30여 명의 작가들은 순서에 따라 각자 준비한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내가 기획한 이 행사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인데, 야유, 개그, 소란, 무질서, 즉흥, 우연이 뒤섞인 ‘난장쇼’였다. 개막 작품은 불이 타들어가는 부채에 적힌 제문을 낭독한 성능경의 퍼포먼스였다. 이승택은 녹색의 대형 포도주 병에 든 막걸리를 관객들에게 따라 주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병의 주둥이에는 과장되게 묘사한 남성기 모양의 조각이 붙어있었다. 김석환은 하얀 연기가 연신 뿜어나오는 방제용 소독기를 관속에 집어넣은 채 어깨에 둘러메고 수원성을 한 바퀴 돈 다음, 트럭을 타고 서울의 행사장에 도착해서 관을 불태웠다. 그의 퍼포먼스는 20세기의 종언을 맞이하여 구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사악한 인간들을 제거하자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2천년대는 한국 퍼포먼스의 국제화 시대로 요약된다.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SIPAF)의 창설을 필두로 김백기가 이끄는 코파스(KoPAS) 그룹, 부천의 홍오봉이 창설한 부천국제행위예술제(BIPAF), 문재선이 이끄는 ‘SORO'와 그 확장으로서의 PAN ASIA(Performance Art Network, ASIA/2008년 창설)가 이 시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국제행사 및 단체들이다. 

김백기가 이끄는 [한국실험예술제]는 2002년에 ‘한국 퍼포먼스 30년’을 테마로 첫 행사를 가진 이래, 홍대 앞을 거점으로 매년 개최하였으며, 제주도로 본부를 옮겨 [제주국제실험예술제]로 명칭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재선의 PAN ASIA는 2019년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서울의 일민미술관에서 창설 10주년 기념 퍼포먼스 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Ⅶ.
한국 행위미술 50주년을 맞이하여 2018년에 대구미술관에서 개최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전시 도록에는 행위예술의 뿌리줄기 개념도가 실려 있다. 리좀적 구조를 지닌 이 개념도는 원래 내가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의 단색화]전에서 ‘단색화(Dansaekhwa)’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맨 처음 고안한 도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도형의 가운데에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이 있고 그 바깥으로 두 개의 원이 퍼져나간다. 가운데 원이 과거, 그 밖에 있는 원이 현재, 그리고 그 밖이 미래이다. 크고 작은 점들을 연결하는 가는 선들이 사방으로 얽혀있는 가운데 선들은 밖으로 뻗어나간다. 그곳은 미래이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점이다. 그 곳은 크게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현재와 미래가 속한 영역이다. 그 밖에 포진해 있는 점들과 용어들을 살펴보자. 사이보그,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살, 로봇공학, 휴머노이드, 사회적 관계망(SNS), 인공지능(AI) 등등은 현재와 미래의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만나거나 융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개념들이다. 과거와는 양상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여, 퍼포먼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정립이 요구된다. 이 도형을 통해 독자들은 “오늘의 행위예술이 단순히 예술의 한 장르나 매체가 아니라, 미래에 전개될 ‘행위예술학(Performology)’의 씨앗을 그 안에 품고 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2)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인종, 문화권을 초월하여 범세계적인 논의와 실행이 필요하다. 

(각주)
1)윤진섭, 저항과 도전, 전위와 실험-변방의 이단아들 : 한국 행위미술 약사(略史), <한국행위미술 50년 :  1967-2017/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2018, 대구미술관 도록, 35쪽. 
2)윤진섭, 앞의 도록, 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