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서예가 송헌 서상호 "스승되고자 하기 보다 제자로 남아 평생 익히고 배워야…자강불식하라”
[Special Interview]서예가 송헌 서상호 "스승되고자 하기 보다 제자로 남아 평생 익히고 배워야…자강불식하라”
  • 인터뷰ㆍ정리/이은영 발행인ㆍ김지현 기자ㆍ사진 김재성 기자
  • 승인 2020.09.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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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첫 전시 온 가족 합심해 준비, 작품만 2만 점 넘어
서예가로서 품어온 지침, 화호애락(和好愛樂), 평화 염원 담아
두보ㆍ 도연명보다 존경하는 인물 정약용, 그의 모든 작품 다 써보고 싶다
정신과 마음 하나로 몰입해 작업하는 전각 가장 좋아해
인사동 경인미술관서 10월7일~13일까지 생애 첫 개인전 열어

일상생활의 모습을 소박한 리얼리티로 표현한 미국의 민속 화가 안나 매리 로버트슨(Anna Mary Robertson Moses, 1860~1961), 그는 뛰어난 예술성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국민화가다. 그는 70세 넘어 미술 공부를 시작해 살아생전 1600점의 작품을 남기고 100살 이후까지도 작업 투혼을 발휘한 점 때문에 대중에게 더욱 각인됐으며, ‘그랜마 모제스’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그랜마 모제스와 같이 노년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열정적 행보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인물이 있다. 구순(아흔) 첫 전시에 ‘출사표’를 던진 송헌(松軒) 서상호 선생이다. 선생은 자신이 직접 지은 호 송헌, ‘소나무로 만든 처마’와 꼭 닮은 삶을 살았다. 세월의 모진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큰 존경을 받아온 어른이자 남편ㆍ아버지다. 현재 3살 연하 87세의 아내와 함께 생활하며, 슬하에는 2남 3녀를 뒀다. 자제들을 대기업 임원ㆍ교수ㆍ사업가 등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인재로 성장시켰다. 사위와 며느리도 현재 고위공직자로, 예술가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한 축들을 담당하고 있어 선생에게 보람이자 자랑이기도 하다.

▲구순의 송헌 선생이 예리한 필봉으로 힘차게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김재성

수년간 건축업에 종사해오던 송헌 선생은, 은퇴 이후인 육순부터 전업 작가를 선언했다. 이후 서예 작업에 전념해 1년에 1000여 점 이상, 30여 년간 총 2만여 점의 작품을 완성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5세 어린 나이부터 선친에게 글씨를 배우며 처음 잡은 붓을, 늦은 나이에 다시 잡으며 하루 하루를 구도자의 자세로 일로정진(一路正進)해 왔다. 내친 김에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대학원에서 유학(사서삼경학)과 서예를 전공했으며, 시ㆍ서ㆍ화(詩書畵)를 아우르는 작업을 이어갔다.

칠순에는 기술적인 숙련뿐 아니라 서예 5체를 익혀야지만 작업이 가능한 ‘전각’에도 도전해 치열한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뜻한 바 있어 국내 전시는 뒤로 하고 중국ㆍ홍콩 등의 전시에서 실력을 드러냈다.

송헌 선생의 이번 첫 개인 전시는 선생의 아들ㆍ사위와 손주 등 온 가족이 합심해 준비했다. 송헌 선생 선친의 서예 작품ㆍ송헌 선생의 작품 150~200여 점ㆍ자손들이 쓴 글귀 등이 이번 전시를 통해 한 공간에 모이게 됐고, 외부에 최초로 소개된다. 자손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시작된 선생의 예술혼이 긴 준비기를 거쳐 관람객과도 만나는 의미 있는 자리로 마련된 것이다. 송헌 선생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한다. “집사람 건강이 좋지 못한데, 집사람을 지키며 완성해온 작품이 나에게는 큰 자산이다”라며, 자식들에게는 “부모를 높게 평가해줘서 감사하고, 전시를 준비해줘 고맙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평생 마음에 품어왔던 ‘큰 욕심 부리지 말고,선하게 살라’는 따뜻한 충고도 전한다. 선생은 조선시대였다면 열부문이라도 세워드려야 할 정도로 병중인 아내 돌봄이 극진해, 주변에도 사표(師表)가 되고, 깊은 울림을 준다.

▲자신이 쓴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 작품 앞에선 구순의 송헌 선생, 첫 전시에 '출사표'를 던졌다ⓒ김재성

선생은 인터뷰 자리를 빌어 기성 서예계에 큰 어른으로서 쓴 소리와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아름다운 조형적 표현뿐 아니라 정신 수련을 추구하는 서예의 깊고 폭넓은 연구와 소질이 있는 인재를 발굴해, 성장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 세대에 서예의 정신과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선 ‘초등학생의 수업 과정 중 서예 수업이 신설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구순의 연세에도 형형한 눈빛과 명철함을 지니고 있는 선생은 젊은이 못지 않은 탄탄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리한 필봉에는 초야에 묻힌 명필의 예술적 저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포구에 위치한 작업실이자 자택에서 송헌 선생을 만나, 구순 첫 전시 개최 소감과 침체된 서예계 발전을 위한 고견을 구했다.

올해 구순을 맞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첫 개인 전시를(10월7일~13일)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구순에 첫 전시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개인전을 열지 않으셨다는데, 이유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1년에 천 여 편 이상 서예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매년 전시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명예가 있어야 되고, 그 명성에만 집중해 정작 글씨에는 주목하지 않는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체(正體)를 쓰는 사람이 적을 뿐 아니라 대통령 휘호를 쓰는 알아주는 작가라도 붓으로 쓰는 글씨가 아닌 펜으로 그려, 보이는 것만 좋게 한 경우가 있다. 선친이 명필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처럼 글씨를 잘 쓰셨다.

나는 5살 때부터 선친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면서, 글쓰기를 배웠다. 어린 시절 주역과 사서삼경 등을 다 익혔다. 대학은 국문과를 나왔고, 퇴직 후 성균관 대학원 유학원에서도 공부하며 30여 년 이상 작업에 몰두했다. 서예가로 인정을 받기 위해선 서협ㆍ미협 등의 초대작가가 돼야 한다. 어떤 이는 5년 정도 겨우 작업해 초대작가가 되기도 하는데, 50년~70년을 연마를 해도 무슨 이유인지 쉽지 않다. 그간 세태가 그러해 전시를 열고 싶지 않았다.

세태에 편승하기 싫어 전시를 열지 않으며, 자존을 지켜오셨는데 구순에 첫 전시회를 열게 된 이유가 자제분들의 간곡한 청이었다는데요. 

내 첫 전시이자 마지막 전시로 준비한 것이다. 자식과 사위, 며느리, 손주들까지 마음을 모아 전시를 준비해줬다. 그동안 써 놓은 작품이 상당해, 언젠간 전시를 열어야지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2만 점이 넘는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나 많이 써놓고, 보관해 놓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사실 이번 전시는 열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는데 자식들, 특히 막내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니 전시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송헌 선생의 자제들이 부모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헌정하는 시와, 송헌 선생이 부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담아 만든 상패

이번 전시와 전시될 작품이 궁금합니다.

전시를 위해 1270점을 추려 사진을 찍었다. 전시 공간에 맞춰 150~200점이 전시되며, 도록에는 300점이 소개된다. 작업량이 꽤 많아 100년을 전시해도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웃음). 이번 전시에는 내 작품과 선친의 작품 일부가 소개된다. 전시가 끝나면 디지털화와 보관ㆍ정리도 다시 할 예정이다. 선친이 쓴 시가 2천 편 정도인데, (선친의 작품을 보여 주며)요즘 사람들이 펜으로 글씨를 써도 선친처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친이 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글과 몇 책이 남아있는데, 서예 대가라고 하는 분들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이처럼 잘 쓴 글씨를 보지 못했다.

전시회를 위해 자제들이 선생께 드릴 상패를 제작했고,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전시회 준비를 위해 애썼다고 들었습니다. 선생께선 추사 김정희가 아내를 그리며 보낸 한시를 인용해 사모님을 위한 헌정시를 쓰셨다는데,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결혼한 지 70년 정도 됐다. 결혼 당시는 내 인생에서 가장 곤란한 때였다. 국방부를 7년 정도 다니고 있었는데 실수를 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부친 나이 일흔두 살 때 모친과 작별하게됐다. 이후 혼자 남은 부친을 서울로 모셔와, 신혼초부터 함께 살았다.금호동 사글세 단칸방 생활을 15년이나 했다.

홀 부모라도 시어머니면 조금 나은데, 좁은 방에서 시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했으니 그 어려움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 않겠나. 그래서 집사람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껴, 혹여 잘못이 있어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집사람이 부친을 극진히 모셨던 것과 특히, 식사를 챙길 때면 항상 상냥한 얼굴로 대했던 고마움이 가슴에 사무쳐있기 때문이다.

▲힘있는 붓질로 글을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송헌 선생 모습ⓒ김재성

집사람은 37살 되던 때 감기약을 잘못 먹어, 약시가 됐다. 현재 87세니까, 그렇게 된지는 만 50년이 된 것이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 1년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많은 노력으로 회복돼 왔는데, 재작년에 넘어져 뇌진탕에 걸렸다. 현재는 눈도 잘 안 보이고 말도 잘 못하는 상태다. 내 집이자 작업실이기도 한 이 공간은 집사람을 지키기 위해 지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인사동에 나가 서예로 돈을 벌고, 논어나 맹자 등 강의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추사가 귀양지에서 한양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 하며 쓴 시를 보며 아내에 대한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했다. 추사의 글보다도 집사람을 위한 내 마음이 크다할것이다. 집사람에게 대한 보은의 마음을 담은 반야심경(般若心經)도 썼다.

도자기ㆍ부채ㆍ접시 등에 작업을 했고, 행서ㆍ예서ㆍ초서ㆍ전서 등의 섭렵뿐 아니라 서화 작업도 하셨다. 이 중 가장 중심에 두는 소재나 서체는 무엇인지요.

두보나 도연명 등 당대 시를 주로 써왔는데, 존경하고 중심에 두고 있는 인물은 정약용 선생이다. 정약용 선생의 작품은 80% 정도 밖에 쓰질 못했지만, 전서를 포함한 모든 작품을 다 써보고 싶다. 정약용이야말로 진정한 선비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작품 중 ‘목민심서(牧民心書)’를 가장 좋아한다. 추사 선생은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까지 올라갔고, 정약용 선생은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시ㆍ서ㆍ화를 통달했다. 중국 사람으로 두보가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정약용 선생의 글을 보면 그 폭이 더 넓고, 깊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글씨체는 해서다. 선친이 해서를 잘 썼다.

전각 작업은 서에 작업과는 다르게, 기술적으로 배워야 할 수 있고 어려운 작업인데요.

성균관 대학에 반궁(泮宮)학원이 있다. 대학 바로 옆에 일반들이 글씨를 배우는 곳으로 초서ㆍ행서ㆍ예서ㆍ사군자 반도 있고 전각반도 있다. 본관에 서예반을 강의했던 고산 최은철 교수(박사)에게 전각을 배웠다. 인사동에서 전각 도구를 사서 70살이 넘어 전각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 간 배워보니 칼로 손을 찍어 쉽지 않더라. 그래서 최 교수의 조언을 들어보니 한 번에 많이 하지 말고, 바느질하듯이 한땀한땀 해나가라고 하더라. 100번 할 것을 1000번에 걸쳐 하라고 했다. 하고있는 작업 중에는 전각이 가장 좋다. 칼과 돌 모두 강한데, 하나의 정신과 마음으로 몰입해야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20년 정도 했는데, 대표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다.

▲송헌 서상호作, 대나무 서화

국내 개인전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지만, 중국ㆍ홍콩 등 전시회에는 참여하셨다. 해외에서 개최한 전시를 설명해 주신다면

수년간 국내외 다양한 곳,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단체 전시에 15회 이상 참여했다. 상도 많이 탔지만 될 수 있으면 은거를 하고자 한다. 서예를 오래 해 작품을 많이 남긴 것이, 나에게는 큰 재산이다. 피와 땀을 흘려가며 완성해온 것이자 집사람을 지켜가며 이어온 작업이어서 의미도 크다. 한국국제문화협회 강신웅 회장과 함께 전시회에 많이 참여했다. 현재는 대한민국 미술협회 서예부문 초대작가다.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하시던 중에 서예협회 초대작가 신청을 하셨다가 그만두게 된 이유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서예협회는 10점 이상을 따야 초대작가가 되는데 9점을 따고 그만뒀다. 기준에 맞춰 점수를 따야만 서예가로 인정받는 시대이다. 이런 제도나 점수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제도에 맞춰 큰 돈을 쓰고, 여러 해 도전하다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소위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 서예의 발전을 막고 있다.

▲송헌 서상호作, 도자에서 글자를 한자 한자 새겨 넣었다

그럼에도 서예계는 ‘서예진흥법’이 시행되며 ‘서예부흥’을 꾀하고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서예전이 마련돼, 담론 형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이런 변화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내용은 들어 알고 있다. 중국은 간체자를 쓰니까, 젊은이들이 복잡한 번체자는 쓰질 못한다. 시가 있어도 읽지 못한다. 간체를 사용해, 영어도, 간체도 아닌 글씨체 간판을 내건다. 일본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나은 편이다. 한문을 정자로 쓰며, 10체 이상의 글씨를 연구해 만들었다. 서예는 단순한 조형 표현이 것이 아닌 정신 수련을 하는 것인데, 한국은 깊이 있는 서예연구가 안 되고있다. 그런데도 글씨를 몇 달 써서 초대작가가 되고 강사가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서예에 대한 권위가 어느 순간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인격을 도야하겠다는 뜻을 가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인격이 뛰어난 사람을 발굴하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상을 주는 등 예술적 업적을 기리는 작업도 필요한데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돈과 연관된 부분도 있어, 못마땅하면서도 안타깝다. 혹여 비리가 있다 해도, 고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작가를 조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대에 와 디지털 발전과 최첨단 필기도구의 출현으로 모필 문화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 서예의 정신과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까요?

초등학생 때부터 서예 교육을 해야 한다. 옛날에는 서당에서 서예를 배웠고, 그것이 발판이 됐는데 현재는 수업조차 없다 보니 몇 달~3년 정도만 익히면 초대작가가 된다. 전서 본을 대고 연필로 그린 후 작업을 하거나, 얇은 종이에 대고 그대로 그린다. 서첩을 보고 모방하는 것은 공부가 되지만, 연필로 필사하는 것은 실력이 늘지 않는다.초등학생 때부터 수업을 듣게 한다면 인재를 발굴해 키울 수 있다. 한 학교에서 두 명씩만 배출해도 큰 성과가 되고 서예 부흥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송헌 서상호作, 서예 작품

전업 작가로서 전시를 열어 온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작업을 이어오셨습니다. 서예가로서 마음속에 품어온 교훈이나 지침ㆍ문장ㆍ내용이 있으시다면

내가 쓴 자작 글이 있다. ‘화호애락(和好愛樂)’ 이라는 말로, 4개의 평범한 한자로 폭넓은 의미를 담았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의미를 다른 글자로 만들었다. 천지와 우주 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평화스럽고 화목한 분위기여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전쟁도 없어야 한다는 의미의 화목할 和자, 남녀와 국가 등이 좋아야 한다는 뜻에서 좋을 好자,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ㆍ자매끼리는 우애를 돈독하게 하며, 사랑 愛자, 자손 대대로 이어지라는 의미의 樂자이다.

이번 전시를 자제분들이 마련했는데, 전하고 싶은말씀도 많으실 듯 합니다

자식 사랑이 많지만 말로 하는 표현은 잘하지 못한다. 첫째부터 막내한테까지 사랑을 똑같이 주고자 했다. 사랑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은 어디에도 비할 바 가 없다. 서예를 한 것도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나를 지표로 삼아 자식들도 그렇게 크길 바랐는데 자식들이 잘 자랐고, 앞으로도 더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자녀들이 쓴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부모를 높게 평가해준 부분이 고맙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바이올리니스트인 막내며느리가 연주도 하고, 손주들도 나와서 내 글도 낭송할 예정이다.(웃음)

▲송헌 서상호作, 서예 작품

그리고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 막내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기도 하다.(웃음) 아들은 일을 하느라 쉬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과욕은 건강을 안 좋게 만든다. 자신의 건강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90살 먹은 나의 건강 비결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것도 많이 먹는 것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악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必有餘慶積惡之家必有餘殃)이라고 했다. 선을 베푸는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있고 악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악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화복무문 유인자초(禍福無門惟人自招)라는 말도 새겨야 한다. 화와 복에는 문이 따로 없고 오직 사람이 자초한다는 것인데, 천지에는 이치가 있으니 억지로 살지 말라는 의미다. 본디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지 치솟지 않는다. 그 이치를 알아야한다. 물은 아래로 흘러 자식에게 가고, 자식은 또 그 자식에게 내려간다.

후학들이나 서예를 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일조일석(一朝一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후학이나 서예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모든 일은 시간을 두고 연마해야한다. 자신만의 공부를 평생하면 그 분야 전문가 된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하며 자강불식(自强不息)해야 한다. 스승이 되기보단 평생 제자로 남아 익히고 배워야 한다.

▲송헌 서상호作, 한글 서예작품

끝으로 개인적 소망이나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실까요

작업실이자 집인 이 공간을 지을 때부터 돈 욕심은 버렸다. 앞으로도 욕심을 버리고 살 것이다.전시 이후에 자식들에게 내 작품을 골고루 나눠줄 예정이다. 남은 작품은 시골 땅에 박물관을 지어 전시하고 내가 죽은 이후에 남은 작품은 국가에 헌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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