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명무 장홍심 회고
[성기숙의 문화읽기]명무 장홍심 회고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10.3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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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30여년 전 이맘때였다. 한강의 지류 중랑천 군자교를 건너 중곡동 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낡은 건물 3층 무용연구소에 그녀는 쇠락한 육신을 의탁하고 있었다. 무용연구소는 남루한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듯 한 눈에 봐도 쓸쓸하고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 놀라울 정도였다. 20여평 남짓 공간은 무용연습실과 주거용 방 그리고 욕실 겸 부엌을 겸해 사용하고 있었다. 삶의 공간과 춤의 공간이 따로 경계 없이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후 수 차례에 걸쳐 중곡동 시장에 있는 무용연구소의 낡은 계단을 오르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1990년대 초반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시절, 전국의 전통무용가 90여명을 대상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한 경험이 있다. 그후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무용사적 관심에서 소외된 몇몇 인물에 대해 개인적 차원에서 심층조사를 실시했고, 그 내용을 글로 남겼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무용가 장홍심이다. 

함흥에서 출생한 장홍심(1914~1994)은 함흥권번·조선권번을 통해 춤의 기본기를 다졌다. 알다시피 권번은 일제강점기 전통예능교육의 산실로 통한다. 이후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에게 입문하여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체계적으로 우리 춤을 익혔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침체해가는 조선가무악의 올바른 보존과 계승을 위해 1937년 한성준이 설립한 전통춤 교육기관이다. 한성준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매개로 전국유랑에서 수집한 민속가락과 춤을 집대성하고 무대양식화 작업을 통해 전통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장홍심은 라이벌 이강선과 함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스승 한성준의  공연무대에 출연하여 스타무용수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강선과 장홍심이 쌍벽을 이루며 당대 전통공연계를 장악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흔히 한성준 제자로는 한영숙과 강선영을 떠올린다. 두 인물이 일찍이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제27호), 태평무(제92호)의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제강점기 한성준이 주도한 전통춤의 지형변화 그 중심에 장홍심과 이강선이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할 중요한 대목이다.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도 화젯거리였다. 1938년 조선일보 후원으로 고전무용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이강선이 언론에 한층 더 부각됐던 모양이다. 충청도 온양(현재 아산) 출신 이강선은 용모가 빼어날뿐만 아니라 민속춤은 물론 장고, 줄타기 등 전통예능 전반에 능통했다. 함흥권번과 조선권번을 거쳐 탄탄한 기본기를 다진 장홍심 역시 탁월한 춤솜씨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사람의 경쟁의식은 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싸움을 벌리는 사건으로 비화될 정도로 치열했다. 이 시절 이강선과 장홍심은 후배들에게 롤모델로 인식될 정도로 실력과 미모가 출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직전 고향으로 돌아간 장홍심은 음악동맹에서 활동하다가 함흥을 방문한 신무용가 최승희와 조우한다. 한성준의 제자라는 이유로 최승희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함께 평양으로 향한다. 최승희무용단에 합류하여 동구권 진출을 위해 총연습까지 마쳤으나 개인 사정으로 포기하고 귀향한다. 함흥으로 복귀한 장홍심은 음악동맹 정회원 자격과 1급 무용수로 승급한다. 그러나 봉건사상이 짙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음악동맹에서 비판받자 1.4후퇴 때 월남을 결행한다.  

주지하다시피, 1.4후퇴는 6.25 전쟁의 흐름을 좌우한 중요한 변곡점으로 인식된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두만강까지 북진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했고, 당시 약 1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남하했다고 전한다. 장홍심도 흥남부두에서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6.25 전쟁 중 부산엔 임시수도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전쟁의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피난지 부산은 예술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다. 무용도 화려하게 꽃피웠다. 1953년 전쟁이 종식된 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부산을 떠났다. 함흥이 고향인 장홍심은 오갈 데 없는 외톨이 신세로 부산에 눌러 앉았다. 그 무렵 호남춤의 명인 이매방과 인연이 닿아 힘든 세월의 고락을 함께 견디었다.

1960년대 후반 장홍심은 서울로 상경하여 여류명창 박초월의 조력으로 다시금 의욕을 불태운다. 전남 순천 출신인 박초월은 조선성악연구회 시절 한성준과 활동한 인연으로 그의 제자 장홍심의 서울 안착을 도왔다. 장홍심에게 그는 은인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1984년 국립극장 주최로 한국명무전(韓國名舞展)에 출연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장홍심은 예사롭지 않은 곡절과 일화를 남긴 채, 1994년 80세를 일기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살아생전 그녀는 혈육 한 점, 올곧은 제자 한명 남기기 못한 것을 평생의 한(恨)으로 여겼다. 후배들이 인간문화재 반열에 오르면서 공적(公的) 지위를 부여받자 그녀는 점차 관심의 영역에서 멀어졌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도 컸다. 사회성과 정치력이 부재한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을 탓하며 한숨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장홍심을 눈여겨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춤배움의 내력에서 그는 정통파에 속한다. 전통시대 교방의 전통을 계승한 권번과 한성준 문하에서 전통춤의 기본기를 체득한 실력자로서 당대 공연무대를 장악한 명무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춤에 내재된 미학적 가치에서 찾아진다. 북방의 역동적이고 활기찬 춤기운을 바탕으로 중고제의 단아하고 정갈한 중도(中道)의 미, 그리고 호남춤 특유의 기방적 기교가 더해져 완숙미로 승화된 듯 싶다. 장홍심은 생존 시 검무·승무·바라승무 등을 즐겨 추었다. 전승가치가 높은 춤들이라 여겨진다.   

정리하자면, 장홍심은 일제강점기 함흥에서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산업화 등 격동의 시기를 관통한 인물로 그 누구보다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홍심을 회고하여 존재론적 의의를 되새기고 그가 남긴 춤을 재음미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이라는 거목(巨木)에서 자라난 춤의 다양한 갈래를 보다 정교하고 엄밀한 학적(學的) 잣대로 접근해야함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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