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의 조명 이야기]궁궐야행 - 호가유금원기
[백지혜의 조명 이야기]궁궐야행 - 호가유금원기
  •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 승인 2020.10.30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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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서울시좋은빛위원회 위원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서울시좋은빛위원회 위원

서울의 경관을 소개할 때 잘 쓰는 용어가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라는 말이다. 서울은 대로에서 벗어나면 바로 작은 골목길이 나타나고 고층건물과 나지막한 상가건물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현대식 공동주택 아파트의 주변에 빼곡이 들어선 주택단지 모습은 익숙하며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궁궐이 현대식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 이미지가 어색하지 않은 곳이 서울이다. 

또한, 서울의 경관 특성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요소가 궁궐이고 절대 언급되지 않는 야간경관 요소가 궁궐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개궁-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이 모두 서울에 있고 하늘에서 서울 도심부 야경사진을 찍어보면 한가운데에 칠흑으로 남겨지는 부분으로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그 옆을 지나다녀도 섬처럼 그 권위를 지키고 있다. 

서울의 인기 관광지 조사에서 궁궐은 늘 명동, 동대문 시장에 이어‘부동’의 3위를 지키고 있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매년 보존, 정비에 많은 예산을 쓰고 있지만 정작 관람자들은 옛것 그대로 보존된 모습보다는 궁궐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행사에 더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궁궐을 주간에 이용하는 사람들은 차방을 이용하거나, 모심기 행사나 고궁음악회 그리고 인문학 특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야간 프로그램은 매우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티케팅이 아니라 피케팅이라고 일컬어지는 창덕궁의 달빛 기행과 경복궁의 별빛 야행은 시기와 인원수가 정해져있어 예매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덕수궁이 2014년부터, 창경궁이 2019년부터 야간에 상시 개방을 하면서 궁궐야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야간에 궁궐을 개방하기 위하여 조명은 필수이다. 조명을 위해서 전기시설이 들어가야 하고 작던 크던 훼손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빛 자체가 시간과 더해지면 목재나 천으로 만들어진 유물을 손상하게 하기 때문에 보전이라는 개념과는 상충하며,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까지 더해져 야간 개방을 제한적으로 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궁궐을 개방한다는 개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 왕 중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는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의 첫 어진을 그린 강세황에게 감사의 표시로 당시 규장각에 근무하던 신하들을 데리고 창덕궁 옥류천 계곡 일대를 산책한다. 옥류천 계곡은 종친과 경재(卿宰·재상) 등과도 연회를 베풀지 않는 국왕만의 신성한 공간이었고 지금도 관람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이 곳을 신하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과 같은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강세황은 호가유금원기에 이렇게 남긴다. 

“어찌 우리 임금께서 몸소 이 미천한 신하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뛰어난 경치를 하나하나 일러주시고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음성으로 한 식구처럼 하신 것과 같겠는가! 내가 어떠한 사람이건데 이와 같이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 멍하니 하늘 상제의 세계에 오른 꿈에서 깨어났나 의심했다”

얼마전 BTS가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이 것이 미국 NBC의 지미팰런쇼에서 방영되었다.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한 BTS가 어디에서 노래한들 화제가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제1궁 경복궁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논의들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거침없이 도전하고 설득해서 이루어 낸 젊은 뮤지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구서울역사와 같은 근대문화유산에 조명을 설치하는 것도 관리주체, 운영주체 그리고 근대문화재위원회를 거치면서 에너지는 소진되고 여러 조건을 달고 어렵사리 성사되었던 전력이 있어 그렇게 생각을 했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문화재청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 사고의 전환이 놀라울 따름이다. 배경 속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화려한 색의 조명으로 비추어져 고유의 색과 질감, 형태가 드러나지 못함이 아쉽고 주변의 자연 풍광을 함께 드러내지 못함은 더더욱 아쉽지만 언젠가 궁궐의 밤이 갖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다른 예술가의 작품에 배경이 혹은 소재가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코로나사태가 1단계로 조정되면서 궁궐이 개방되어 창경궁 야간 산책을 다녀왔다. 호가유금원기에 남겨진 말처럼 황제의 세계에 다녀온 꿈을 꾼 듯 도심의 고즈넉함, 어둠의 침묵 그리고 텅 빈 아름다움을 한껏 즐기고 왔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역사 속 이야기를 속속들이 듣지 않아도 묵묵히 그 시간들을 살아온 나무와 풀을 보고 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 언택트와 거리두기, 큐알코드, 방역과 같은 피로한 일상의 언어들을 피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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