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21살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여행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21살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여행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11.0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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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드디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이제 시작됐고, 나는 이미 그 속에 푹 빠져들었다.” 

1830년 10월 10일, 21살의 펠릭스 멘델스존은 마침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그림을 맘껏 보았다. 특히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인 <성모승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옛 거장의 그림은 젊은 멘델스존의 마음속에 음악으로 메아리쳤다. 산마르코 광장, 통곡의 다리, 가면 축제…. <이탈리아> 교향곡의 첫 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빠르고 생기있게)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행복감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90 (파보 예르비 지휘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교향악단)

그는 피렌체로 발길을 돌렸다. 르네상스의 영광이 살아 숨쉬는 피렌체는 멘델스존의 눈에 푸른빛으로 보였다.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멘델스존은 이 도시의 풍경을 수채화에 담았다. “계곡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았는데, 도시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멘델스존은 로마에서 겨울을 났다. 로마의 첫인상은 밝게 빛나는 달빛 같았다. 그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햇빛 잘 드는 아파트를 전세 낸 뒤 일과표대로 규칙적으로 지냈다. 정오까지는 작곡에 몰두했고, 오후에는 로마의 명소를 관람했고, 저녁때는 카페 그레코를 찾아 독일 출신 화가들과 어울렸다. 손님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고,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유럽 부유층은 성년이 된 자녀를 이탈리아로 보내 고대 로마 문화와 르네상스 인문정신을 체험케 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다. 멘델스존은 엄청난 명문가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성공한 은행가였고, 할아버지 모세는 겸손과 관용을 설파하여 ‘독일의 소크라테스’란 별명을 얻은 철학자였다. 어머니 레아는 여러 언어에 통달한 교양인으로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최초의 음악 선생이었다. 멘델스존의 집에는 헤겔, 하이네, 호프만, 훔볼트, 훔멜, 슈포어, 베버 등 당대 최고의 문인과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런 인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곧 펠릭스의 교육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은 이 ‘엘리트 교육’에 마침표를 찍는 의미가 있었다.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있는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있는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

어린 시절의 멘델스존은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천재였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괴테는 말했다. “멘델스존이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짤배기 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그 자리에 있던 음악가들도 이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17살에 이미 <한여름밤의 꿈> 서곡, 현악8중주곡 Eb장조 등 그의 대표작을 썼다. 

20살 때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굴하여 무대에 올린 것은 멘델스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음악사의 큰 공적이었다. 그는 외할머니 벨라 잘로몬이 선물한 <마태수난곡> 악보를 20세 되던 1829년 3월 11일 직접 지휘하여 부횔시켰다. 대곡의 초연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였다. 이 연주회는 음악사의 전설적인 사건이었다.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연주회장 앞에서 발길 돌린 사람이 천명을 넘었다. 멘델스존은 지휘봉을 들고 침착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알토 파트를 맡아 노래한 누나 파니 멘델스존은 이렇게 기억했다. “음악은 연주회장보다 교회에 어울릴 법한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의 증언이다. “영원히 위대하고 무한히 기적적인, 강력하고 고귀한 작품이다. 이토록 완벽한 공연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멘델스존은 헌신과 특출한 재능으로 비범한 일을 해 냈다.” 이 날 이후 바흐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부활했고, 바흐 연구 열풍이 불었고, 어느새 ‘음악의 아버지’ 자리로 올라가게 됐다. 

멘델스존은 유태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7살 때인 1816년 기독교로 개종한 뒤 평생 루터교 신앙 속에서 살았다. 하이네의 말에 따르면 유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 수난곡>을 발굴, 지휘한 것은 유럽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의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멘델스존은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됐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멘델스존은 이제 세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기 위치를 자리매김할 참이었다. 이탈리아를 향한 <그랜드 투어>는  그가 ‘제2의 모차르트’로 비약할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그는 1830년 5월 베를린을 출발한 뒤 바이마르에서 괴테를 만났다. 일찌기 어린 멘델스존의 재능을 찬탄했던 괴테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 기록한 자기의 체험담을 얘기해 주었을 것이다.

▲멘델스존이 그린 피렌체 풍경,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 성당이 보인다. 
▲멘델스존이 그린 피렌체 풍경,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 성당이 보인다. 

멘델스존은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음악의 수도 빈과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들렀다. 위대한 옛 거장들의 흔적을 찾던 그는 뼈아픈 실망을 맛보아야 했다. 그 곳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와 요젭 라너의 왈츠에 열광할 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음악의 성지에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통속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까지 순진하게 품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했다. 

이탈리아는 어떨까? 찬란한 르네상스의 피렌체, 바로크의 위대한 거장들을 낳은 베네치아는 좀 다를까? 마찬가지였다! 멘델스존이 고전음악을 찬미하면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웃어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놀랍게도 고전음악에 대해 무지했고, 음악가들을 존중할 줄 몰랐다. 오케스트라는 선율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았고, 합창단의 화음은 엉망이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의 유산인 베키오 궁전의 바닥에 침을 뱉었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품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으려고 연필과 칼을 들이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