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유일의 고려 도성, 강화중성에서 문지 최초 확인
남한 유일의 고려 도성, 강화중성에서 문지 최초 확인
  • 왕지수 기자
  • 승인 2020.11.0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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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유튜브에서 발굴조사 성과 4일에 온라인 공개
문헌에 기록된 중성의 성문 최초 확인
성벽의 축조방식을 새롭게 파악

[서울문화투데이 왕지수 기자] 문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유적이 최초로 발견됐다. 바로 강화중성의 문지이다.

▲강화중성 제2차 발굴조사 전경(사진=문화재청)
▲강화중성 제2차 발굴조사 전경(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소장 유재은)는 남한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 시대 도성인 강화중성에서 문지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문지는 문이 있던 자리를 말한다. 
  
강화중성은 고려 시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로 천도한 이후 건립한 3개의 성곽 중 하나다. 『고려사』등 문헌기록에는 1250년에 축조되었고, 둘레가 2,960칸이며, 17개의 크고 작은 성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화중성은 수도 강화를 ‘⊂’ 형태로 둘러싼 토성으로, 현재 확인된 길이는 총 11.39㎞이다. 당시의 모습을 가장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번 조사는 2019년에 이은 제2차 조사로, 강화중성의 서성벽 구간을 대상으로 했다. 

강화중성의 문지는 너비 4.4m, 길이 5.3m로, 안쪽에는 성문이, 바깥쪽에는 보도시설이 설치되었다. 성문은 장방형의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4개의 기둥을 세워 시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외곽에는 넓적하고 편평한 돌을 경사지게 깔아 보도를 조성했다. 문지 주변에서는 용두(龍頭)를 비롯한 장식기와와 평기와, 장식철물, 철못 등 문과 지붕 부재로 추정되는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한편, 조사 당시 문지는 석축담장으로 막혀있는 상태였다. 이는 성문 폐기 직후 담장을 쌓아 문지를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1259년 몽골과의 화의에 따라 외성과 내성을 헐어버렸을 때 중성도 같이 파괴되었거나,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갔던 당시에 중성이 폐기되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틀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넣어 단단하게 다지고, 그것을 켜켜히 쌓아올린 강화중성 성벽의 판축 토루(사진=문화재청)
▲틀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넣어 단단하게 다지고, 그것을 켜켜히 쌓아올린 강화중성 성벽의 판축 토루(사진=문화재청)

성벽의 축조 방법도 새롭게 확인했다. 그간 강화중성은 틀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넣어 단단하게 다지고, 그것을 켜켜히 쌓아올린 성벽인 판축 토루 안과 밖에 흙을 덧대어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 조사구역의 성벽은 판축 토루만으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성벽은 석축기단을 쌓고 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판재를 결구하여 틀을 만들고 성질이 다른 흙을 여러 겹 다져 쌓아 너비 4.1~4.4m, 높이 2.5m 내외로 완성했다. 

이번 조사는 문헌에 기록된 중성의 성문을 최초로 확인하고, 역사적 상황에 따른 성곽의 폐기 양상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성벽의 축조방식을 새롭게 파악했다는 점에서 강화중성을 비롯한 토성 축조방식 연구에 소중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강화중성 제2차 발굴조사 성과는 4일 국립문화재연구소 유튜브(www.youtube.com/nrichpr)에서 온라인으로 공개한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강화도성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