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행정인과 예술인의 직업 정체성 차이는 무엇일까?
[장석류의 예술로(路)] 행정인과 예술인의 직업 정체성 차이는 무엇일까?
  • 장석류 KMAC 한국능률협회컨설팅 공공문화 컨설턴트/행정학 박사
  • 승인 2020.11.1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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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KMAC 한국능률협회컨설팅 공공문화 컨설턴트/행정학 박사
▲장석류 KMAC 한국능률협회컨설팅 공공문화 컨설턴트/행정학 박사

문화예술을 구성하는 행정인, 기획인, 예술인이라는 세 부족이 있다. 기획인이 행정과 예술이 혼합되어 있는 중간지대의 정체성을 갖고 세 부족을 이어준다면 행정인과 예술인은 끝과 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결이 참 다르다. 그렇다면 이 두 집단의 직업 정체성은 어떤 차이를 보일까?  

행정인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자기 조절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규범과 제도 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예산은 가능한가?’, ‘법과 규정에 맞는가?’, ‘절차에 문제가 없는가?’ ‘감사에 문제가 없는가?’ 등의 규범적 책무 중심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기본적으로 득점을 하는 것보다 실점을 줄이는데 강점을 가지고 있다. 행정인이 행정을 선택한 직업 동기는 공직봉사의 이유도 있겠지만 보수와 안정 등 외재적 요인이 강하다.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직업으로 행정을 택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위험보다는 안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인들에게 비교적 신뢰를 많이 받고 있는 문화부 서기관으로 있는 연구참여자 A에게 어떤 행정인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현장에 있는 예술인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해결책을 찾아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현 제도의 문제점을 조금이라도 개선해서 예술인들의 창작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 그들의 신뢰를 받는 행정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당연해 보이는 답변은 행정인 직업 정체성의 근간을 얘기하고 있다. 행정의 시작은 현장을 듣는 것에서 그 일이 출발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던지는 투수로서의 직업 정체성보다, 귀를 열고 현장을 듣는 포수의 역할이 좋은 행정의 기본이다. 현장을 자신의 뒤에 두고 생각을 소신껏 던져야 할 때는 상관이나 타 부처의 협조와 설득이 필요할 때이다. 

반면 직업으로서 예술인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자기 조절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내가 관찰하고 느낀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예술적 기량은 어떻게 향상시키고, 예술적 목표를 어떻게 공유할까’, ‘관객과 어떤 방법으로 소통할 것인가’ 등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기본적으로 실점을 관리하기보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득점을 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직업 안정성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 있는 예술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동기는 무엇일까? 극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참여자 B에게 물었다. “제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극작가인 것 같아요. 극작을 잘하기 위해 연극연출을 하는 것 같아요. 연극을 만드는 최초의 동기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였어요. 너무 엄마가 보고 싶은데, 나의 기억 속에 있던 엄마와 했던 말들, 장면들을 쓰고 연습하고 초기작들은 거의 그런거에요. 일종의 이산가족이거든요.” 예술의 시작은 내적인 곳에서 나오고, 관찰에서 시작되어 자신이 느끼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또 다른 예술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음악은 제게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존재여서 특정한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좀 오글거리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피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남들처럼 유명해지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버릴 수 없는, 어렵지만 당연히 걸어가게 되는 길인 것 같아요.” 

공무원은 직업 선호도에서 높은 순위를 보인다. 하지만 행정을 하는 사람들의 피는 다르다고 얘기하거나, 내 몸 속에는 행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행정인과 행정은 분리하기가 쉽지만, 예술가와 예술은 분리하기가 어렵다. 행정인은 정책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정책의 뒤에서 숨기도 편하다. 하지만 피아노를 치고 있는 예술가와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를 분리할 수 있을까? 예술은 노동생산성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 시간당 피아노 연주를 2배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다. 절반의 인원으로 캣츠를 공연하기도 어렵다. 예술을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결과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무대에 서 있는 예술가 그 자체를 최종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예술가는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예술 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술가의 역량이 높아지면 예술의 가치도 같이 올라가는 것이다. 예술가의 직업 정체성은 내가 가진 예술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행정의 직업 정체성은 공공이라는 외부에서 온다면, 예술가의 직업 정체성은 내 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잘 느낄 수 있는 예술가는 행정은 잘 몰라도 좋은 행정인이 누구인지는 구별할 수 있다. 행정이 예술을 잘 몰라도 좋은 예술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가의 예민함을 행정인은 불편하거나 비논리적이라고 느낄 수 있어도, 좋은 귀를 가진 행정인이라면 정책에 반영해야하는 중요한 한 자락을 찾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부와 서울문화재단에 있는 행정인과 인터뷰를 해보면, 기재부나 정보화진흥원에 있는 행정인과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행정인 중에서도 문화를 선택한 행정인은 경제, 법무, 국토, 교육 등에 있는 행정인과 분명 차이가 있다. 문화를 선택한 행정인과 예술인의 직업 정체성에는 문화예술이 더 피워지길 바라는 비슷한 동기가 존재한다. 공동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달의 뒷면이 되어, 좋은 예술가가 자신의 실력을 피워내는 것을 바라보는 좋은 문화예술 행정인은 자신의 직업에 보람을 느낀다. 문화예술을 선택한 행정인과 예술인은 달의 앞뒷면에 있지만 같은 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