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방구석 예술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방구석 예술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11.1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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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Corona 19(Corvid 19)로 대변되는 팬데믹(pandemic)은 긴 인류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 이전(B.C : Before Corvid)과 이후(A.C : After Corvid)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인간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인류가 맞이한 미증유의 이 대재앙이 불러 온 가장 큰 심리적 타격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감이다. 인류는 이제 올림픽을 비롯하여 윌드컵, 엑스포처럼 준비에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대제전을 예전처럼 마음놓고 기획할 수 없게 됐다.

미술의 경우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트리엔날레, 카셀도큐멘타(5년)와 같은 국제 행사를  여는 일이 어려워졌다. 일본은 올해 예정됐던 올림픽을 연기했으며,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한 세계의 대부분 국제미술행사들이 예정대로 열리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연기하지 못한 행사들은 열리긴 했으나 궁여지책으로 웹 공간에서 보는 사이버 전시의 형태를 취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현실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인간의 활동이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른바 문명의 대전환(paradigm shift of civilization)이 도래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점차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는 문화의 패턴이다. 이제까지 인간이 창안한 문명의 기기 중에 스마트폰처럼 개인화된 것은 없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전체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그것은 마치 군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소총처럼 때로는 문화전쟁의 단말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인종 간의 분규를 낳는 도구로 쓰여지기도 한다. 

컴퓨터의 등장이 낳은 이메일은 개인을 전자화하였으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점조직화를 가속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통제가 가능한 정교한 피륙으로 변해갔다. 얼책(facebook)과 같은 SNS 매체의 등장은 부족국가와 같은 원시공동체 사회의 유비를 낳았다. 5천 명으로 제한한 얼책의 친구 수가 그것이다. 고대 부족국가의 인구가 5천 명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이버 상에서의 소통 방식이다.

알다시피 얼책에는 공유(share) 기능이 있다. 타인이 올린 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거나 혹은 나중에 필요할 때 보기 위해 자신의 계정에 옮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공유한 컨텐츠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을 경우 그것은 마치 럭비공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컨텐츠는 뉴욕에서 상파울루로, 상파울루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국경을 넘어 실시간으로 돌아다닌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대인은 전자 유목민이며, 사이버 상에서 소통하는 초국가적 디지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리좀적 구조를 띤 사이버 상에서의 소통 형태는 수많은 개인과 개인 간의 접촉으로 인해 점점 더 미궁화되며 결과적으로는 복잡한 회로 속에 갇히게 된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코로나 사태가 낳은, 방역의 필요성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QR 코드의 등록으로 인한 통제와 감시의 폐해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집단화에서 개인화로의 이행으로 요약되는 문화의 패턴이 미래에 가져다 줄 변화의 양상이다.

코로나나 혹은 새로운 이름을 달고 닥칠 팬데믹으로 인해 올림픽이나 비엔날레와 같은 인류의 대제전이 열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인간의 문화활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개될 공산이 더욱 커진다. 특히 인류가 마스크를 써야하는 비대면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은 고독한 상황에서 예술을 비롯한 문화활동을 행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얼책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매체를 통해 웹상에서 소통을 할 수 밖에 없다. 

아주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지만, 나는 진정한 문화의 민주화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의 작품이나 생각을 아무런 사전 검열이나 통제, 혹은 선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얼책이나 인스타그램 등등의 소셜매체에 올릴 수 있듯이, 떼지어 하는 문화의 형식(올림픽, 월드컵, 비엔날레, 각종 엑스포 등등)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문화와 예술이 각종 서열이나 위계, 차별, 불평등과 같은 제도적 폐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위와같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지고 검증된 인류의 문화적 형식과 제도들이 지닌 장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과 생태계의 질서를 거역함으로써 야기된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방구석에서 조용히 반성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