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해적’은 ‘해적(Le Corsaire)’이 아니다-국립발레단 183회 정기공연
[이근수의 무용평론]‘해적’은 ‘해적(Le Corsaire)’이 아니다-국립발레단 183회 정기공연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0.11.1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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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굳이 ‘해적’이란 제목을 달아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승전결의 드라마전개가 다르고 주역들의 캐릭터가 변했다. 배경과 무대 설정도 원작과 상이하고 작곡과 편곡을 더한 음악은 어디까지가 아당(Adolph Adam)이고 밍쿠스(Leon Minkus)고, 작곡과 편곡인지 혼란스럽다. 정다영이 원작을 각색하면서 이렇게 바꾼 이유에 대해 긴 설명을 붙였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캐릭터들 이름과 의상을 달리한다면 창작품이라고 해도 속을 만큼 원작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1856년 요셉 마질리에르(Joseph Mazilier) 안무에 의한 파리에서의 세계초연작, 1858년 쥘 페로(Perrot) 안무로 볼쇼이극장에 올린 개정판 해적, 1899년 프티파에 의해 마린스키극장에 올린 작품이나 1955년 표트르 구세프의 개정작과도 다르다. 1994(김혜식), 1998(최태지), 2005년(박인자) 등 세 차례에 걸쳐 프티파 버전을 재구성하여 올린 국립발레단의 ‘해적’과도 다른 버전이다. 그렇다고 메도라가 콘라드의 아내이고 귈나라가 연인이었던 바이런(Lord Byron)의 원작 시(the Corsair, 1814)를 살려낸 것도 아니다.

160년 넘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되고 캐릭터와 음악이 추가되었지만 이들 ‘해적’엔 공통점이 있었다. 노예시장과 할렘, 메도라를 사이에 둔 해적과 파샤간의 치명적인 암투, 그리고 해적선의 난파로 완성되는 두 사람의 로맨스라는 기본적인 텍스트였다. 국립발레단의 2020년 판 해적(11.4~8, 오페라극장)은 제목을 그대로 쓰면서도 해적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나는 개막 첫 날, 이재우(콘라드)와 박슬기(메도라), 김기완(알리), 정은영(귈나라), 변성완(비르반토)으로 구성된 메인 캐스팅 공연을 보았다. 

원작의 3막은 2막으로 축소되었다. 1막은 60분, 2막은 45분이다. 노예시장에서 콘라드와 메도라의 만남이라는 극적인 동기는 사라지고 물자를 보충하고자 섬에 내린 해적과 축제장에서의 밋밋한 만남으로 각색되었다. 메도라를 사이에 둔 해적과 터키 부호 파샤의 대결이라는 드라마는 왕에 의해 부과된 세금을 내지 못해 메도라가 끌려간다는 안이한 설정으로 변경되었다.

노예시장에 나왔던 메도라는 아름다운 섬의 순진한 처녀로, 메도라의 노예친구인 귈나라는 왕국의 사제로 변신했다. 콘라드와 알리, 비르반토 등 해적선의 주요인물 외에 왕과 왕자 등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되었다. 등장인물간의 관계설정이 복잡해지면서 주역의 존재는 퇴색하고 안무의 동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해적선의 침몰과 주인공의 극적인 생환을 통해 해적이란 이름을 버리는 원작의 결말은 해적기를 높이 올린 해적선의 새 출범으로 끝을 맺었다.  

각색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이번 공연의 가장 큰 아쉬움은 원작의 트레이드마크인 콘라드∙메도라의 파드되가 약화됨에 있다. 1964년 뉴욕공연에서의 폰테인과 누레예프, 1974년 런던에서의 로라 브라운과 폴 러셀, 그리고 초창기 메도라를 춤췄던 타글리오니, 파블로바 등과 같은 전설적인 명품 춤은 아니더라도 국립발레단 공연에서의 김지영과 이원국(1998), 김지영과 김용걸(2005)의 파드되 정도는 기대해야하지 않았을까.

드라마발레에서 텍스트는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색과정에서 서스펜스와 클라이맥스가 사라진 텍스트는 관객들을 무료하게 했고 캐스팅의 미숙과 부조화(이재우와 박슬기, 박슬기와 정은영, 김기완과 변성완 등)가 눈에 띄었다. 첫날 이재우와 박슬기의 파트너링은 현격한 두 사람의 신장차(30+cm?)로 인해 처음부터 부조화를 드러냈다. 솔로이스트 정은영을 이재우와 만나게 하고 김기완과 박슬기를 매치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다른 캐스팅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좌석이 확보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춤에서는 김기완과 정은영의 솔로가 빛났다. 디베르티스망을 대신해 들어간 듯한 4명 사제들의 춤에선 마지막 순서인 김지현의 춤이 좋았다. 1막의 시작과 2막의 끝 부분을 장식한 해적단의 군무는 힘과 스피드에서 그나마 국립발레단의 체면을 살려준 장면이었다. 

언제까지 국립발레단은 신진들에게 정기공연 안무를 맡길 것인가. 단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의 발레 관객들은 전막 안무에 익숙지 않은 단원들의 시험작에 만족하지 못한다. 강수진 예술감독 혹은 그녀의 안무를 도울 수 있는 재야의 명장들과의 협력안무를 통해서라도 관객의 눈높이를 채워줄 작품들을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