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교방가요』와 운창 성계옥
[성기숙의 문화읽기]『교방가요』와 운창 성계옥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11.1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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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지난 금요일 타임머신을 타고 30여년 전을 여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유익하고 보람있었다. 한국음악학의 권위자 송방송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음악사학회 주최 제20회 학술대회가 이진원 교수를 좌장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로캠퍼스 강당에서 열렸다. “의암별제의 예술사적 조망”을 주제로 여덟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지난 2009년 작고하신 운창(芸窓) 성계옥 선생을 조망하는 추모학술대회로 선생의 업적을 회고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성계옥(成季玉. 1927~2009)은 경남 산청에서 유학자 집안의 후손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 성갑주는 예(禮)와 의(義)를 숭상한 창녕 성씨 후손으로 자부심이 컸다고 전한다. 학문을 중시한 집안 분위기는 성계옥의 예술활동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일본 통신학교 세이바시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1세 때에는 준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등 향학열이 남달랐다. 또 만학도로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과를 수료하는 등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산청에서 진주로 이주하여 교편생활을 하던 성계옥은 진주권번 출신 춤의 명인 강귀례 문하에 입문하면서 춤의 첫 발을 내딛었다. 스승 강귀례는 그녀를 보자마자 “어데서 이리 예쁜 년이 왔노”라면서 반겼다. 춤을 배우면서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정신적 충만감을 맛보면서 점차 춤에 빠져들었다. 스스로 ‘사주에 천예(天藝)가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진주검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듬해 1968년 이 춤의 예능보유자 김자진 선생이 찾아와 전수생으로 등록할 것을 권유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진주교방춤 전승의 길에 나섰고, 10여 년간의 이수자 과정을 거쳐 1978년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그후 진주검무뿐만 아니라 진주지역 전통춤의 체계적인 보존 전승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

한학에 조 예가 깊 었던 성계옥은 『교방가요(敎坊歌謠)』와 인연을 맺으면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다. 고종 9년(1872)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1817~1899)이 편찬한 『교방가요』는 조선후기 진주 교방의 예악문화와 악가무 및 선비들의 풍류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당대 문사(文士)이자 독서인층을 대표하는 엘리트지식인 정현석이 진주목사 시절 교방에서 전습된 가무악을 접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진주교방의 가무악을 풍속교화라는 관점에서 선택적으로 기록했는데, 이른바 필산지법(筆刪之法)의 방식을 취하여 『교방가요』의 기록적 가치를 더욱 배가했다.

학계에서 희귀본으로 간주되는 『교방가요』는 현재 네 가지 판본이 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교방가요(敎坊歌謠)』, 고려대도서관 소장본 『교방제보(敎坊諸譜)』, 통문관 소장본 『교방가보(敎坊歌譜)』 그리고 춤자료관 연낙재가 소장하고 있는 『교방가요(敎坊歌謠)』 등이 있다.

조선후기 진주교방에서 전습된 악가무를 기록한 『교방가요』는 공연예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문헌에는 육화대, 연화대, 헌반도, 고무, 포구락, 검무, 선악, 항장무, 아박무, 향발무, 황창무, 처용가무, 의암별제가무, 승무 등 정재와 민속춤을 비롯 제례무용이 망라되어 있다. 그 외 가곡과 가사, 판소리, 잡희, 잡요, 단가 등 전통음악이 수록돼 있다. 악부시체의 한역시와 연행모습이 그려진 채색화가 있어 더욱 가치롭다. 이러한 연유로 『교방가요』의 글과 그림은 진주교방에서 전습된 무악의 원형복원에 긴요한 쓰임새로 활용된다.

운창 성계옥은 일찍이 예리한 통찰력으로 『교방가요』의 기록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봤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교방가요』의 존재를 처음 접하고, 이 문헌에 토대하여 진주교방춤의 복원작업에 나선다. 그의 집념으로 진주검무(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의 미학적 완성이 구현되었고, 나아가 진주한량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진주포구락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선악(선유락), 진주의암별제 등이 복원되는 성과를 거뒀다.

1992년 10월 4일(음력 9월 9일 중양일) 일제강점기 중단되었던 의암별제가 처음 복원 설행되었다. 의암별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 『교방가요』에 토대하여 복원된 제례의식무이다. 기생들이 제관을 맡고 유교식 제례의식에 악가무가 병행된 풍류적 성격의 제의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특히 제례가 끝난 후 화려한 여흥가무가 펼쳐진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성계옥에 의해 발굴 복원된 의암별제는 30여년 간 매년 진주 촉석루에서 설행되고 있다. 진주를 대표하는 전통축제로 자리매김된지 오래다. 『교방가요』와 성계옥의 특별한 인연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의 표징이다.

돌이켜보건대, 의암별제와 『교방가요』는 필자와도 인연이 깊다. 1992년 2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몸담았고, 그해 10월 4일 진주 촉석루에서 봉행된 의암 별제 현장조사를 위해 첫 지방출장을 갔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의암별제 설행을 진두지휘하던 운창의 모습은 흡사 전쟁터의 ‘야전사령관’과 다름없었다. 의암별제 현장조사 후 처음으로 복명서 및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후 연구논문으로 발전시켜 학술지에 게재했다.

그후 세월이 흘러 2005년 초여름 어느 날 『춤』지 발행인 조동화 선생께서 『교방가요』의 존재를 물으셨다. 1992년 의암별제 복원 설행의 현장에 있었고, 그 결과를 토대로 논문을 집필했던터라 『교방가요』의 문헌적 가치에 대해 아는 범위 내에서 열과 성을 다해 설명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어줍 잖은 언설이었지만 당시 조 선생은 감탄하는 눈치셨다. 그후 조 선생을 매개로 안동 선비의 후손이 간직했던 『교방가요』를 연낙재가 소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연낙재의 『교방가요』 소장내력엔 특별한 일화가 전한다.

반추해 보면, 진주의 의암별제와 『교방가요』 그리고 성계옥 선생은 필자와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 2006년 선생은 이전에 출간했던 『의암별제지(義巖別祭誌)』 증보판을 펴냈다. 책과 함께 정성 담은 글귀를 보내주셨다. 빼어난 서예 솜씨에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한학에도 남다른 식견이 있었던 그는 집요한 탐구력으로 『교방가요』의 문헌고증을 통해 진주교방춤을 발굴 복원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를 일컫어 ‘학무(學舞)’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이유다. 운창 성계옥 선생은 진정 우리 전통예술계의 ‘큰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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