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19세기 민족음악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19세기 민족음악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0.12.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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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츠키’ 행진곡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빈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데츠키> 행진곡, 이 곡을 연주할 때 청중들은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연주에 동참한다. 오케스트라와 객석의 벽을 허물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 이념과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너머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새해를 기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데츠키’는 누구일까? 그는 오스트리아의 존경받는 노장군으로, 1848년 쿠스토자 전투에서 이탈리아 무장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개선했다.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그를 환영하기 위해 이 행진곡을 작곡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영광된 승리의 기억과 결부되어 있는 셈이다. 라데츠키 장군에게 진압당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면 떨떠름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 곡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과 상관없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 됐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사람들을 열광시킨 노래가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베르디(1813~1901)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이웃 강대국에 의해 분열되고 점령당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울분을 오페라에 담았다. 

그는 초기 오페라 <에르나니>, <레냐노 전투>, 그리고 이 <나부코>를 통해 통일 · 독립을 열망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여기서 ‘나부코’는 고대 바빌론의 왕 네브카드네자르 2세를 이탈리아 말로 옮긴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초토화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탈리아 관객들은 억압받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했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들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진 명곡이 됐다. 오페라 <나부코>는 베르디의 출세작이 됐고, 그는 이탈리아 통일 · 독립 운동,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베르디는 평론가들이 자기 오페라가 너무 통속적이라고 비판하면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잘 됐네, 대박이 나겠군.” 더 많은 대중이 자기 오페라를 알게 될수록 통일 · 독립이 앞당겨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1861년 이탈리아는 마침내 통일 · 독립을 이뤘고, 베르디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와 동일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이름 베르디(VERDI)는 ‘Vittorio Emmanuele, Re Di Italia’ 즉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유럽 음악은 민족주의를 떼놓고 이해할 수 없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전 유럽을 휩쓴 뒤 유럽 각 나라는 민족의식에 눈떴다. 유럽은 근대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으로 들끓었다. 변방의 약소국인 체코, 헝가리, 폴란드, 핀란드, 노르웨이가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다. 폴란드의 쇼팽, 체코의 스메타나,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러시아 5인조 등이 바로 이 ‘민족음악’의 대표 작곡가로 꼽힌다. 특별히 ‘민족음악’ 작곡가로 불리지는 않지만 바그너, 베르디를 포함, 19세기의 거의 모든 작곡가가 일정하게 민족주의 성향을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19세기 낭만음악을 모두 민족주의로 설명하려 든다면 오류겠지만, 민족주의를 배제한 채 19세기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족음악’의 대표작으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스메타나의 <블타바>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들어보자.     
   
스메타나 <나의조국> 중 ‘블타바’
  
“똑, 똑, 똑….” 봄이 오면 보헤미아 남쪽, 높이 1300미터 고원의 얼음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다. 두 대의 플루트가 두 줄기 발원지의 물소리를 묘사하고, 이윽고 강물이 흐르면서 다양한 강변의 풍경들, 숲속의 사냥, 농부의 혼례가 펼쳐진다. 강물은 이윽고 프라하 시내로 흘러가 체코 사람들의 영광된 과거를 노래한다. 독일 이름 ‘몰다우’(Moldau)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블타바’ 강. 스메타나(1824 - 1884)의 교향시 <블타바>는 체코 사람들의 가슴에 어머니로 살아 있는 이 강을 주제로 억압받는 조국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을 노래한다. 

▲1989년 민주화를 이룬 직후 열린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라파엘 쿠벨릭의 지휘로 ‘블타바’가 연주됐다. 하벨 대통령 등 청중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 명연주였다. 
▲1989년 민주화를 이룬 직후 열린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라파엘 쿠벨릭의 지휘로 ‘블타바’가 연주됐다. 하벨 대통령 등 청중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 명연주였다. 

스메타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블타바’ (1990년 ‘프라하의 봄’ 음악제, 라파엘 쿠벨릭 지휘 체코 필하모닉 연주)   

스메타나는 체코 민족 음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작곡가다. 국제적인 명성은 드보르작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19세기 체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통일된 민족으로 일어서려 할 때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체코 국민의 지성과 도덕의 잠재력을 일깨워 준 사람이다. 이 곡을 체코 사람들이 마음 깊이 사랑하는 국민적 교향시로, 체코 필하모닉은 해마다 ‘프라하의 봄’ 음악제 첫날 - 스메타나가 서거한 5월 12일 - 에 이 곡을 연주하는 전통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