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경기도무용단의 야심작, ‘률(律)’
[성기숙의 문화읽기]경기도무용단의 야심작, ‘률(律)’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12.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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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말했다. 인류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마르크스가 설파한 계급투쟁의 논법이 무대로 소환됐다. 경기도무용단이 2020 레퍼토리시즌공연으로 올린 ‘률(律)’(2020.11.26.~29,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 ‘률’을 통해 실로 오랜만에 극적 서사를 담은 극장 예술춤의 진수를 맛보는 행운을 누렸다.  

경기도무용단의 ‘률’은 고려 신종 때인 1198년 민중혁명의 상징인 ‘만적의 난’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만적은 원래 무신 최충헌의 노비였다.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혁명을 꿈꿨으나 한충유의 노비 순정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종말을 고한다. 만적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다. ‘률’의 안무가 김충한 예술감독은 이번 작업에서 한국판 ‘스파르타쿠스’를 표방했다고 밝혔다.

알다시피, ‘스파르타쿠스’는 발레무용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노예반란의 역사에서 로마의 검투사 출신 스파르타쿠스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동료 70여명과 검투사양성소를 탈출하여 로마군대와 맞서 싸우다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 스파르타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크라수스는 로마 최대의 군벌로 성장했다. 그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하여 권세를 누렸다. 로마공화정 시절 스파르타쿠스가 외친 처절한 함성은 인류 역사의 진보를 견인하는 값진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꼽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쿠바 공산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도 스파르타쿠스를 가슴에 새겼다고 전한다. 역사는 이렇게 뜻있는 소수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진보해 간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스파르타쿠스’는 우리에게도 발레작품으로 낯익다. 1968년 러시아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스파르타쿠스’는 20세기 최고의 발레안무가 유리그리가로비치의 안무작이다. 음악은 아람 하타투란이 맡았다. 초연 때 화려한 출연진도 주목거리로 떠올랐다.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 예카데리나 막시모나, 마리스 리예파, 니나 티모페예바 등 세기의 무용수들이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물론 유리그리가로비치 이전에도 스파르타쿠스는 발레의 소재로 무대에 올랐다. 1956년에  레오니드 야곱슨이, 그리고 1958년엔 모이세프가 안무한 이력이 있다. 로마제국 말기 노예반란의 주역 스파르타쿠스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발레역사에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신화와 전설 혹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왕자와 공주, 요정 등이 출연하는 환상의 세계를 그린 고전발레에서 계급갈등을 다룬 역사극으로 전환되는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스파르타쿠스’는 유리그리가로비치의 버전이다. 최태지 예술감독 시절인 2001년 유리그리가로비치 지도로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려 관심을 끌었다. 볼쇼이발레단이 로마시대 노예반란의 주역 스파르타쿠스를 소재로 했다면, 경기도무용단의 ‘률’은 고려시대 민중반란의 상징 ‘만적의 난’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스파르타쿠스와 마찬가지로 만적 역시 노예 혹은 노비로서 최하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인물이 갈구한 자유와 해방의지를 구현하려는 열망도 공통점에 속한다. 

작품 ‘률’의 등장인물 또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작품엔 모두 다섯 명의 인물이 나온다. 우선 주인공 ‘률’은 파문당한 문신 집안의 후손으로 혁명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랑’은 권력다툼의 틈새에서 부왕의 천적인 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등장하는데,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욕망의 화신 ‘휘’는 률의 가문을 멸족시키고 왕을 능욕하다가 결국 죽임에 이르게 하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작품 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는 남루한 모습의 노인은 역사의 증언자로서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로 설정돼 있다. 

작품 ‘률’의 구도는 비교적 선명하다. 계급질서에 따른 선악(善惡)의 구도로 짜여져 있다. 선악의 구도에서 보자면, 률은 민중 혁명의 주체로서 선(善)의 입장을, 그리고 휘는 악(惡)의 축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각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은 탄탄한 기량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했다. 서정적 음악을 배경으로 내밀한 감정 선을 살린 률과 랑의 2인무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긴 소매춤의 여성 군무진의 움직임은 아름다운 인체미학의 백미였다. 한편 역동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남성군무도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40여명에 달하는 남성무용수들의 절도 있는 움직임은 다이내믹한 집단성을 주조로 긴장감있게 표현되었다. 발레 ‘스파르타쿠스’의 전투신을 연상케 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한 김태근의 음악도 주목된다. 양악과 국악의 절묘한 조화는 극적 서사를 견인하는데 일조했다. 

결론적으로 작품 ‘률’은 우리시대 탁월한 춤꾼이자 최고 역량을 자랑하는 안무가 김충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 무대로 손색이 없다. 모던한 분위기의 입체적 조형성 그리고 스펙타클한 공연미학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겨냥한 김충한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그런데 작품 ‘률’은 댄스컬이라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역사무용극에 가깝다. 주제와 기법 면에서 국립무용단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송범의 대표적 무용극 ‘도미부인’과 견줄만하다. 

세대론적으로 볼 때 김충한은 특별한 존재다. 그는 명무 정재만의 수제자이자 애제자로 통한다. 우리 춤의 속 깊은 멋과 테크닉컬한 기량은 스승 정재만을 빼닮았다. 김충한의 춤맥은 정재만과 그의 스승 한영숙, 그리고 그 선대(先代)인 한성준으로 소급된다.

주지하다시피, 한성준은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으로 20세기 초반 한국 춤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구자로 명성이 높다. 정재만에서 한영숙, 그리고 한성준으로 맥이 닿아 있는 그는 한국 춤에서 가장 권위있는 계보선상 그 중심적 위치에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근대 신무용(新舞踊)을 창출하여 세계무대로 진출,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널리 알린 조택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조택원의 신무용 명작 ‘가사호접’은 그를 능가할 춤꾼이 없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김충한이 안무한 계급투쟁을 다룬 역사무용극 ‘률’은 한국무용사에 또 하나의 걸작으로 기록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