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남산예술센터, 서울에서 가장 쓸쓸한 동상 앞에서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남산예술센터, 서울에서 가장 쓸쓸한 동상 앞에서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0.12.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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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새해엔 남산에 드라마센터가 생겨 본격적으로 극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솟는다”라고 이근삼(1929 ~ 2003)은 썼다. 60년 전인 1960년, 그 해의 연극계를 “대문은 거창하나 판자집”이라고 일갈하면서, 드라마센터가 생긴 후의 연극의 부흥을 기대했다. (1960. 12. 16. 동아일보)

1962년 4월 12일, ‘한국 최초의 연극전용의 전당’ 드라마센터는 개관을 했다. 개막작 ‘햄릿’엔 김동원, 장민호, 황정순이 출연했다. 7월 6일,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는 무대극으로선 처음으로 KBS-TV로 중계되었다. 8월 18일, 뮤지컬 ‘포기와 베스’가 무대에 올랐다. 대한민국 뮤지컬의 새로운 흐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방화와 외화와 당당히 견주면서, 추석시즌까지 장기공연을 했다. 1964년부터 시작해서, 드라마센터에선 ‘봉산탈춤’을 종종 공연했다. 서울연극학교 (현, 서울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이 탈춤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무대에 올렸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개관 2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에선 김재권(방자), 전무송(몽룡)이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동랑의 회갑을 기념해서 ‘대춘향전’이란 이름으로 공연되었다. (1965. 12. 10 ~ 12) 모두 유치진 각색의 ‘춘향전’에 뿌리를 둔 작품이다. 1935년 2월 1일부터 4월 15일까지, 조선일보(석간)에 연재되었다. 고전에는 없는 디테일이 살아있으며, 당시 신극운동을 펼쳤던 유치진의 생각을 깊이 읽게 된다. 

‘풍운아 나운규’(차범석 작, 이원경 연출)도 어찌 뺄 수 있겠는가? 전옥(어머니)와 강효실(딸)의 연기대결에 관심이 쏠렸다. 신구, 전운, 전무송이 함께 공연했다. (1965. 6. 3 ~ 7)

신성일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 (1964년)은 지금도 회자된다. 김기덕 감독(1934 ~ 2017)은 서울의 곳곳을 영화 속에 잘 담았다. 드라마센터가 두 사람이 데이트 장소. 부잣집 딸 요한나(엄앵란)에게 익숙하고, 거리의 부랑아 두수(신성일)에겐 낯선 공간이다. 김기덕은 알다시피 전 서울예술대학 학장이다.

드라마센터는 때론 영화를 상영하거나, 클래식과 전통예술을 공연했다. 이를 통해서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언제나 연극이 중심이었고, 창작과 실험의 병행했다. 

1970년대로 건너뛰면, ‘초분’(`1973년, 유덕형 연출)을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한다. 뉴욕무대에서 호평을 받았고, 제 10회 한국일보 연극영화대상에서 연극부분 대상을 받았다. 드라마센터는 1974년 4월 4일을 기억할 것이다. 유덕형은 양동음정(陽動陰靜)과 상충조화(相衝調和)의 극적 논리를 내세웠고, 당시로선 드물게 ‘집단연출’을 표방했다.

1984년 2월 10일, 동랑 유치진 10주기 추모제에서, 만정 김소희의 추모창이 불렀다. 유치진과 김소희 (1917 ~ 1995)는 가까웠다. 한국전쟁기엔 ‘가야금의 유래’(부산극장)를 공연했다. 동랑의 극본으로 만든 여성국극이다. 김소희는 ‘배꽃아기’라는 여주인공이었고, 크게 히트했다. 환도 후 연극으로 공연했고, 훗날 영화 가야금(1964년, 권영순 감독)의 원작이기도 하다.

남산예술센터(2009 ~ 2020)는 그간 공공극장으로서 한국사회와 한국연극의 연결고로서 큰 역할을 했다. 열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이 수없이 많았지만 몇 해 동안 5월이면 공연했던 ‘푸르른 날에’를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드라마센터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없앤 극장이다. 관객의 위에 있고, 배우가 아래에 존재하는 무대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도 많았다. 연극 ‘됴화만발’(조광화 연출)을 드라마센터의 무대를 십분 활용한 작품으로 꼽고 싶다.

이 극장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라는 표시가 있다. 거기에 동랑 유치진 선생의 동상이 있다. 1984년 10월 29일, 동랑의 10주기에 세워진 동상이다. 극장 앞 동상이여! 그 모습이 나에게만 쓸쓸하고 처량한가? 제막식 때 함께 했던 문화인에게 묻는다. 동랑을 존경하고 따랐던 그들에게 묻노라. “남산예술센터(드라마센터)는 정녕 이렇게 끝나야 하는 것인가?”

1961년, 드라마센터의 설립과정에서 비난과 우려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동랑을 비롯한 문화인들은 드라마센터가 “연극문화를 연구 실험하는 집”이라 역설했다. (1961년 7월 6일, 경향신문) 그들이 당시 외쳤던 한 마디가 있다. “드라마센터는 흥행장(興行場)이 아니다” 60년이 지난 후, 이 곳이 흥행장이 될까 두렵다. 우리의 문화가 60년 전으로 퇴보하는 건 아닐까? 부끄럽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