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런던,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Ⅱ] 세계의 일부이자 개별적 세계인 것들: 테이트의 한국미술 소장품
[2020 런던,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Ⅱ] 세계의 일부이자 개별적 세계인 것들: 테이트의 한국미술 소장품
  • 전민지 비평가
  • 승인 2020.12.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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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로비는 투박하고 둔중하다. 런던 템즈강 부근의 한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이러한 외관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도시재생의 역사에서도, 미술관의 역사에서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러나 수직과 수평 방향으로 탁 트여 있는 이곳이 모든 이들의 목소리를 한 곳에 담아내는 장소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미술관 입구에서 로비까지의 경사로를 한껏 상기된 얼굴로 내려오는 방문객들, 로비 한가운데에 누워 거대한 설치작품을 올려다보는 이들, 그리고 수장고 곳곳에 숨어 있는 작품의 주인공들을 떠올려보면 이곳의 철제 구조물들은 오히려 속삭이는 존재들로 느껴진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해바라기 씨 조각들로부터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의 작품에 등장하는 시리아 난민의 얼굴까지, 개인들의 작은 역사와 국가 단위의 큰 역사가 빗방울처럼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이곳은 그리하여 세계 곳곳으로부터 공시적이고도 통시적인 목소리들을 축적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지금, “미술관 경험의 시작점이자 종착점”, “관람 계획을 세우는 베이스캠프”로서 작동하는 로비로 말미암아 테이트 컬렉션의 한국미술 소장품을 살펴본다.

▲Nam June Paik, Bakelite Robot, 2002.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Nam June Paik, Bakelite Robot, 2002.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테이트 모던의 수석 큐레이터이자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Hyundai Tate Research Centre: Transnational)을 이끌고 있는 이숙경에 따르면, “테이트 갤러리가 영국 미술의 범주를 넘어 국제 현대미술의 컬렉션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정은 개관 직후인 1917년에 이미 내려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구축된 테이트의 장기적 계획은 실제로 현실화되었고, 곧이어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Tate St Ives)의 4관 체제를 갖춤으로써 ‘영국 미술관’이던 테이트는 ‘세계 미술관’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와 더불어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힌 컬렉션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비유럽권 미술 작품을 다수 확보하게 되었으며, 국제/현대미술을 다루는 거대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현재 웹사이트에 공개된 자료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테이트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된 한국 현대 미술가들은 백남준(1932~2006), 이승택(1932~), 김구림(1936~), 이우환(1936~), 윤석남(1939~), 이건용(1942~), 서도호(1962~), 이불(1964~), 구정아(1967~),양혜규(1971~), 김성환(1975~), 문경원∙전준호(문경원, 전준호, 1999년 결성), 장영혜 중공업(장영혜, 마크 보주, 1999년 결성)이다. 작고한 백남준을 제외하면 193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까지 여러 세대의 생존 작가들이 테이트의 한국 현대미술 컬렉션을 이룬다. 개별 작품의 수로 보았을 때는 백남준의 작업이 총 17점으로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다른 12명/팀의 작가들의 총 컬렉션과 유사한 수치로, 한국미술 소장품의 약 50%에 달하는 비율이다. 또한 소장 작가 및 작품의 절대적인 수는 영국, 인도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은 편이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근과거와 동시대가 나름대로 얽혀 있는 흔적으로서 존재한다.

▲Nam June Paik, Can Car, 1963.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 (왼쪽), Nam June Paik, Flux Fleet, 1974.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 (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Nam June Paik, Can Car, 1963.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 (왼쪽), Nam June Paik, Flux Fleet, 1974.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 (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해외의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미술품을 논하는 데 있어 백남준을 제외하기란 감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에서 잠시 눈을 돌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MoMA(The Museum of Modern Art)나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만 보더라도, 백남준의 작품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테이트에서의 백남준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올해 초까지 선보였던 테이트 모던 백남준 회고전 《Nam June Paik》(2019.10.17. - 2020.02.09.)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숙경 큐레이터를 주축으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과의 공동기획에 의해 탄생한 이 전시는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백남준의 작품 200여 점을 통해 ‘초연결사회’라는 시대성을 짚었다. 물론 테이트에서의 백남준 전시는 이전에도 있었다. 테이트 리버풀에서의 《Nam June Paik》(2010.12.17. - 2011.03.13.)의 경우 약 90점의 작품으로 작가의 생애를 돌아보고자 했던 시도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백남준이 다시금 회자되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탈국가’와 ‘연결성’”, 그리고 “‘접속’돼 있는 세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후의 세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재접속할 수밖에 없다.

▲Nam June Paik, Untitled, 1984.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Nam June Paik, Untitled, 2003.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Nam June Paik, Untitled, 1984.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Nam June Paik, Untitled, 2003. © Nam June Paik Estate,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재접속의 필연성을 증명하듯이, 테이트 또한 백남준의 다양한 작품을 소장해 왔다. 백남준의 유족인 하쿠다(Hakuda) 가족의 기증 작품이 있는 반면, 2014년 체결한 현대차와의 파트너십을 기점으로 구매한 작업들도 여럿 있다. 작가의 시대별 작업을 촘촘히 소장하고 있지는 않으나, 작업 초기의 1963년 작품 <Can Car>부터 작고 직전인 2005년 작품 <Victrola>까지 그 범주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를 아우른다. 우선 <Can Car>의 경우,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 초기 활동을 펼쳤던 독일에서의 작업이다. 1961년 만난 플럭서스(Fluxus) 예술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의 영향으로, 백남준은 일상적 오브제 및 저렴한 재료에 예술작품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작품의 제목은 오브제의 본래 정체가 ‘깡통(can)’임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 이러한 플럭서스적 기반은 또 다른 소장품 <Flux Fleet>(1974)에서도 유사하게 구동된다. 다섯 개의 작은 다리미로 함대(fleet)를 만들어 ‘Fluxus Fleet’, ‘Destroyer’, ‘Battleship’ 등의 단어를 적어둔 이 작품 역시 단순한 일상재료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손에 쥐어 쉽게 찌그러뜨릴 수 있던 음료 캔은 자동차가 되고, 진부한 가정용품인 다리미는 차례로 나아가는 군함 부대가 된다.

백남준은 그간 숱한 드로잉을 남겼는데, 테이트 또한 <Untitled>(1984), <Untitled>(2003), <Cage Waves>(1996)를 비롯하여 그의 드로잉을 몇 점 소장하고 있다. 여러 <무제> 작품 중 2003년 작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 2003년 5월호에 아크릴 물감과 파스텔로 그린 작업으로, 웃는 얼굴이 여러 번 등장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색색으로 그려진 표정과 텔레비전 전파를 형상화한 듯 지직대는 선들은 백남준의 드로잉에서 패턴처럼 반복되는 요소이다. 그런가 하면, 1984년 작 <무제>와 1974-1992년 작 <무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겨 거겨 그규’ 등 한글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그는 한자와 한글, 영어 단어들을 적어나가며 아이디어를 기록했고, 언어로써 정체성의 근원을 드러내는 동시에 초국적인 시도를 지속했다. 혹자의 평가와 같이 2000년대까지만 해도 백남준에 대한 조명이 유럽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되짚어 보면 테이트의 백남준 소장품은 가히 미래지향적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잠시 내려두고 백남준의 초기 플럭서스 정신, 무화된 경계의 초연결성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Kim Ku-lim, Death of Sun Ⅰ, 1964. © Ku-lim Kim,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Seung-Taek Lee, Godret Stone, 1958. © reserved,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Kim Ku-lim, Death of Sun Ⅰ, 1964. © Ku-lim Kim,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Seung-Taek Lee, Godret Stone, 1958. © reserved,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다음으로는 한국의 실험미술, 아방가르드, 초기 퍼포먼스/행위예술의 원류 등 다양한 수식어를 지닌 – 이제는 ‘원로 작가’가 된 - 김구림, 이승택, 이건용을 꼽을 수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최초로 전위미술의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 세대로서, 이들은 이전에는 국내에서 시도된 바 없는 대지미술이나 퍼포먼스 작업들을 발표해 왔다. 먼저, 김구림의 작품은 이우환과 함께 백남준에 이어 가장 많은 총 4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업 <Three Circles>(1964), <Death of Sun Ⅰ>(1964), <Light Bulb>(1977), <Relation>(1987) 중 <Death of Sun Ⅰ>은 2020년 12월 기준 테이트 내 《In the Studio: The Disappearing Figure: Art after Catastrophe》 전시에서 공개된 상태이다. 작가는 휘발유를 바른 비닐에 불을 붙이고, 그가 상상한 형상이 만들어질 때쯤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이로써 불에 탄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은 비닐은 있으면서도 없는 태양이 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물은 흔적인 동시에 또 하나의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즉, 김구림의 초기 페인팅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그가 오랜 기간 다뤄왔던 흔적이나 관계, 창조와 파괴 등의 본질적 관념이 여실히 녹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Lee Ufan, Relatum, 1968, 1994. ©Lee Ufan,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Yun Suknam, Being Restricted Ⅰ, 1995. ©Yun Suknam,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Lee Ufan, Relatum, 1968, 1994. ©Lee Ufan, Photo © Tate. CC-BY-NC-ND 3.0(왼쪽), Yun Suknam, Being Restricted Ⅰ, 1995. ©Yun Suknam, Photo © Tate. CC-BY-NC-ND 3.0(오른쪽)(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승택 회고전의 제목 《이승택-거꾸로, 비미술》(2020.11.25. - 2021.03.28.) 또한 보여주듯이, 이승택 작가는 비미술(non-art)과 비조각(non-sculpture)의 영역을 정립한 인물이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2012년에 이르러 테이트에 소장된 그의 작업은 초기작 <Godret Stone>(1958)이다. 추후 작업에서도 거듭 등장하는 ‘고드랫돌’은 그가 행했던 물체 묶기 작업, 재료의 물성을 뒤집는 전환 행위, 그리고 비조각을 위한 오브제 실험의 기반으로도 독해된다. 이건용의 경우, 여섯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1975년 작품 <Logic of Place>가 소장되었다. 이들은 작가가 스스로 대표작이라 언급한 바 있는 <장소의 논리>를 기록한 결과물이다. 큰 원을 하나 그리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원 안에 들어갔다가 “여기”, “저기” 등의 단어를 외치며 다시 나오는 반복적 행위는 실로 “장(場)의 논리를 교란 내지 증폭시켜 자문케 하는” ‘논리적’ 작업이었다. 이곳에서도 1970년대 한국미술 실험기를 대표하는 신체 퍼포먼스의 족적은 신체의 지각과 장소 인식을 위한 새 방법론을 온전히 담아낸다. 아직 성능경, 이강소 등 이들과 동 세대 전위미술을 대표하던 작가들의 작업은 테이트에서 소개되지 않았다. 다만 적은 수의 작품으로나마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현장을 톺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국미술에 대한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우환과 윤석남의 작품 또한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생한 시대는 비슷하나, 각기 다른 작업 세계를 펼쳤던 이들은 앞서 언급된 1930년대 작가들과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 모노하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일찍이 국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이우환은 <From Line>(1978), <From Winds>(1982), <Correspondence>(1993), <Relatum>(1968, 1994)으로 소장 작가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Relatum>은 테이트 모던의 《Materials and Objects: A View From Tokyo: Between Man and Matter》 작품 일부로 전시되어 있다. 이우환의 작업에서 몇십 년간 사용된 제목 ‘관계항’은 이원론을 거부한 그의 철학적 개념을 구체화한다. 동명의 소장품의 경우, 물질과 시각성에 대한 이우환의 초기 탐구작으로서 재료가 서로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은 자신의 삶과 경험을 기초로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이다. 당시 국내 특유의 가부장적 문화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작업세계는 1995년 작품 <Being Restricted Ⅰ>에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1990년대 풍요로운 가정의 상징이던 바로크식 의자를 가까이 두고 그 주변을 맴돌던, 또는 맴돌 수밖에 없었던 작품 속 여성은 결국 그곳에 앉지 않는다. 사실상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테이트의 아시아 페미니즘 연구에 요구되는 한 기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o Ho Suh, Staircase-III, 2010. © Do Ho Suh, courtesy Lehmann Maupin Gallery, New York,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Do Ho Suh, Staircase-III, 2010. © Do Ho Suh, courtesy Lehmann Maupin Gallery, New York,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소장 작가 목록에는 1990년 이후 국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1960-70년대생 작가들 또한 포진해 있다. 미국 유학을 기점으로, 다양한 도시로의 이주 경험을 통해 ‘집’에 대한 고민을 풀어 온 서도호는 한옥의 구조를 휴대 가능한 구조로 재구성했다. 일견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환기하는 듯한 작품 <Staircase-III>(2010)는 저 너머의 형상이 투명하게 보이는 직물 특유의 성질만큼이나 양가적이고도 이중적인 집의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한편 이불은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 나아가 그에 대한 편견을 뒤흔드는 사이보그 형상을 제시하였다. 1988년 작 <Untitled (Cravings White)>는 2011년 재제작되어 테이트에 소장되었는데, 천으로 구성된 조각의 부드러움과 촉수로 뒤덮인 기괴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프랑스에서의 학업을 발판으로 하여 비교적 빠른 시기에 유럽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구정아의 작업 <Cedric>(2003) 또한 소장되어 있다. 개념미술가로 잘 알려진 그는 스틸/무빙 이미지와 사운드,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형태의 작업을 넘어 최근 Acute Art와의 증강현실 작품 협업 등으로 매체의 스펙트럼을 개척해가고 있다.

양혜규 역시 근 몇 년을 기준으로 분석하였을 때, 해외 전시 참여 및 개최 빈도가 가장 높은 한국 미술가 중 한 명이다. 현재 테이트 아이브스에서의 개인전 《Haegue Yang: Strange Attractors》(2020.10.24. - 2021.05.03.)은 물론, 2012년 퍼포먼스, 필름 작업을 위한 전시실로 첫 선을 보인 테이트 모던 더 탱크스(The Tanks)에서 《Haegue Yang: Dress Vehicles》(2012.11.11. - 2012.11.16.) 전시를 연 바 있다. 2018년 테이트 컬렉션에 포함된 그의 작업은 2015년 시작된 <솔 르윗 뒤집기> 연작의 일부 <Sol LeWitt Upside Down - 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 Split in Three>(2015)이다. 작품명에서 “23배로 확장 후 셋으로 나누었다는” 부분이 작가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개념과 그 형식을 변형했다는 점을 예상케 한다. 그뿐 아니라 테이트 모던 신소장품전 《Materials and Objects: Haegue Yang》에서 현재 공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양혜규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재료이자 시각 언어인 ‘블라인드’의 무한한 확장성을 증명해 보인다.

▲Lee  Bul, Untitled (Cravings White), 1988, 2011. © Lee Bul,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Lee Bul, Untitled (Cravings White), 1988, 2011. © Lee Bul,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양혜규와 마찬가지로 탱크스 개관전에 참여했던 김성환은 국내에서의 활동보다 해외 활동이 두드러지는 작가다. 당시 전시된 여러 작품 중 현재 테이트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2012년 작 <Temper Clay>로, 총 20여 분 분량의 비디오 작업이다. 한때 테이트 모던 건물의 지하실이었던 탱크스 공간은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로 채워져 있었다. 캐서린 우드가 짚었듯이 김성환은 커미션 작업으로써 “테이트 모던의 광대한 건축 단지 안에 속한 그 공간의 특징뿐만 아니라 런던이라는 특정한 위치가 지닌 산업적 과거도 우리가 인식하도록” 공간 전반을 구성하였다. 지하실 아래에 마치 또 다른 지층이 있는 것처럼, 작가는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의 과거를 끝없이 들추어냈다. 지리적 경계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맥락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으로, 이어서 한국 현대사의 편린들로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었다.

▲Haegue Yang, Sol LeWitt Upside Down - 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 Split in Three 2015. © reserved,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Haegue Yang, Sol LeWitt Upside Down - Structure with Three Towers, Expanded 23 Times, Split in Three 2015. © reserved,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웹 아티스트 그룹 장영혜 중공업의 작품으로는 <YOUNG-HAE CHANG HEAVY INDUSTRIES PRESENTS: DOWN IN FUKUOKA WITH THE BELARUSIAN BLUES>(2010), 그리고 이 작품에 앞서 제작된 <Teaser>(2010)와 <Trailer>(2010)가 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폰트와 사회비판적 텍스트, 작곡된 사운드가 덧대어진 플래시 영상들이다. 그 이해에 있어 작품의 장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 작업의 기저에는 문학이자 음악이면서도 시각예술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마지막으로, 테이트 리버풀에서 개인전 《Moon Kyungwon and Jeon Joonho: News From Nowhere》(2018.11.23. - 2019.03.17.)를 진행했던 문경원∙전준호가 있다. 테이트는 이들의 공동 작업 중 2채널 영상 <The End of the World>(2012)를 소장했다. 해당 영상의 미장센과 연출로부터 공상과학 영화가 곧장 연상되는데, 작가들은 미래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상을 제시함으로써 “오늘날의 인간 조건과 불분명한 미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Moon Kyungwon and Jeon Joonho, El Fin del Mundo (The End of the World), 2012. © Moon Kyungwon and Jeon Joonho, Courtesy of the artists and Gallery Hyundai,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Moon Kyungwon and Jeon Joonho, El Fin del Mundo (The End of the World), 2012. © Moon Kyungwon and Jeon Joonho, Courtesy of the artists and Gallery Hyundai, Photo © Tate. CC-BY-NC-ND 3.0(사진=테이트 모던 미술관)

지금까지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된 국내 작가 및 작품을 압축적으로나마 소개하였다. 이로써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한국미술 소장품에 있어 여전히 (재)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테이트는 비서구권 미술로 소장 및 연구 분야를 넓혀 왔다. 또한 이숙경 큐레이터가 테이트 컬렉션 아시아 태평양 소장품 구입 위원회 책임 큐레이터를 맡았던 이래로 여러 한국 작가들이 글로벌리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 등 미술사적 관점에서 독해되었고, 아시아 현대미술 내 크고 작은 담론의 주인공이 되었다. 즉, 앞서 살펴본 작품들은 세계의 일부이자, 그 자체로 개별적 세계다. 각각을 한국-미술이나 한국/미술로 읽어내는 자유 또한 주어졌으니, 이를 사유하는 장은 이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덧붙여 현재 소장 작가들 못지않게 유럽, 북미 곳곳의 해외 미술관에서 수차례 소개된 바 있는 김범, 강서경 등의 작가군, 동시대 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다음 세대의 작가들을 테이트에서 만나볼 날 또한 머지않았기를 바란다. 결국 우리가 다시 돌아갈 미술관 로비는 종착점이라기보다 근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일 것이다.

[각주]

1)미술관 구조/부분의 일부로서 ‘로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대형 설치작품이 주로 전시되는 중앙부의 본래 명칭은 터바인 홀(Turbine Hall)이다. 이곳에서 현대자동차의 커미션 전시 ‘현대 커미션(Hyundai Commission)’가 이루어지며, 2021년 말에는 한국계 작가 아니카 이(Anicka Yi)의 개인전이 진행될 예정이다. (2021.10.05. - 2022.01.09. 개최 예정)
2)아이 웨이웨이는 1억 개 이상의 해바라기씨 모양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 징더전(景德鎭)의 장인들을 고용했다. 《The Unilever Series: Ai WeiWei: Sunflower Seeds》 (2010.10.12. - 2011.05.02.)
3)타니아 브루게라는 열 감지 잉크로 터바인 홀의 바닥에 시리아 난민의 얼굴을 그렸다. 《Hyundai Commission: Tania Bruguera: 10,148,451》 (2018.10.02. - 2019.02.24.)
4)그린앤블루(전민지, 이유진), 『인터플레이: 아트 뮤지엄에 관한 대화』, 부크크, 2019. p. 13.
5)이숙경, <[영국의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
6)https://www.tate.org.uk/about-us/collection
7)김민, 「백남준 회고전 개최하는 영 테이트모던 큐레이터 인터뷰」, 동아일보, 2019.10.15.
8)고드랫돌은 발이나 돗자리를 엮는 우리나라 전통 수공예에서 매듭을 묶을 때 쓰던 작은 돌들을 의미한다.
9)김찬동, <이건용의 세계 – 논리로부터 삶, 그리고 일상으로의 긴 여로>, 아르코예술기록원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2011.
10)https://www.tate.org.uk/art/artworks/suknam-being-restricted-i-t14383
11) https://acuteart.com/artist/koo-jeong-a/
12)캐서린 우드, 「김성환, 템퍼 클레이」, 『말 아님 노래』,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2014. p. 16.
13)이숙경, <비판적 디스토피아: <News from Nowhere>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