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영상 포함]- 박재동 화백 “작품으로 사회 문제를 ‘말하고 싶다’”
[Special Interview-영상 포함]- 박재동 화백 “작품으로 사회 문제를 ‘말하고 싶다’”
  •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0.12.11 10: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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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작가 13인과 ‘말하고 싶다 2020’ 온라인 전시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된 세상으로의 표출”
경기신문에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시사만평 연재, 연일 화제 불러 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진보연 기자]모든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한국의 미술 운동 그룹 ‘현실과 발언’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탄생하였다. 1979년에 미술가들과 평론가들이 모여 발족한 ‘현실과 발언’은 당대 사회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설정했다. 

당대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술의 사회적 맥락을 밝히고 그 역할을 모색했다. ‘현실과 발언’은 1990년 해체됐으나, 이 그룹의 미술가들은 우리 사회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어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림은 아름다움과 새로움 뿐만 아니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 현실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도 함께 담는다. 최근 온라인을 통해 공개된 ‘말하고 싶다 2020’ 전시 또한 이러한 메시지 전달의 일환이다. 과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박재동 화백은 현실 발언 정신을 이어, 13명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이번 ‘말하고 싶다 2020’ 전시에 참여해 그림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박재동 화백이 이번에 출품한 작품들은 근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그 자신도 연루된 ‘미투’ 사건에 대한 것들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문제 제기와 반론이 허용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표현했다. 

전시 활동과 더불어 지난 11월 23일부터는 경기신문에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라는 이름의 매일 연재도 시작했다. 윤석열 검찰총장 관련 만평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예전의 시사만화계를 평정했던 실력이 역시나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곳에서 그는 시사와 관련된 현실 발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소회에 대한 전반적 감상을 그림에세이 형식으로 독자들과 나눌 예정이다.

지난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용기로 촉발된 미투 운동이 가려졌던 약자들의 고통을 드러내고 치유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 왔다. 이에 앞서 민형사상 소송을 통해 실질적으로 가해자를 응징한 남정숙 전국 미투 피해자연대 대표(前 성균관대 교수)가 있다. 이들의 용기로부터 지금까지 제2, 제3의 서지현, 남정숙이 나오고 피해구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용기를 내서 ‘With You’를 외치며 미투를 견인해 놓으니 이를 악용한 ‘가짜 미투’, ‘기획 미투’로 인한 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진짜 피해자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미투는 대부분 당사자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라고 호소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히 피해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가해자는 응당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분노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거짓미투라면? 기획된 미투라면? 가해자로 몰린 이들의 무고함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며, 그에 희생된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사람이 평생을 쌓아온 신뢰와 명예, 그가 지켜온 가치는 일순간 추락해 버린다. 한 인간의 일생이 부정당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사이 수많은 억울한 미투 피해자들에 편승해 가짜 미투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거짓으로 인생이 바닥으로 내 던져진 이들의 무너진 삶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박재동 화백
▲박재동 화백. ⓒ김재성 사진작가

박재동 화백의 미투 사건은 지난 2018년 2월 26일 SBS ‘8뉴스’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온 후배 만화가 이 모 작가를 성희롱하고 성추행했다”라는 보도를 통해 시작됐다. 박 화백은 SBS 보도에 대해 정정 보도와 반론 보도를 요구하는 소를 제기해, 정정 보도 요구는 1ㆍ2심에서 패소했고, 반론 보도 요구는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난 7월 29일 경향신문 강진구 기자는 박재동 화백 쪽에서 2년 전 미투 피해자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다룬 기사([단독] 박재동 화백 ‘치마 밑으로 손 넣은 사람에 또 주례 부탁하나’ 미투 반박)를 인터넷판에 올렸으나, 4시간여 만에 삭제됐다. 이 신문 편집국장은 이 기사가 ‘성범죄 보도준칙’에 어긋나고 미투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가 있다고 봤지만, 강 기자는 SNS 활동과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기사 삭제 조치를 비판했다.

이 모 작가의 박 화백 성추행 폭로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박재동 화백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를 범죄자로 확신하고 단정해 버린 결과가 아닐까? 범죄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그를 두둔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 행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지레 움츠린 것이다. 그동안 박재동 미투 사건을 꾸준히 취재해 보도해 온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관계를 좀 더 상세히 짚어보고 박재동 화백의 입장을 들어보기로 했다. 

■화백 박재동, 그림으로 세상을 이야기하다

지난 여름 아틀리에 오픈, 최근 시사만평 게재 등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듯하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
내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며 먼저 연락을 주신 덕분에, 지난 7월 인사아트프라자 한쪽에 개인 작업을 위한 작은 아틀리에가 마련됐다. 활기가 돌고 사람들과 마주하기 좋은 위치다. 감사한 배려를 받아 적절한 시간에 나와 사람들을 그려주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중에 경기신문의 연락을 받게 됐다. 만평을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감사했다. 오랫동안 시사 만화계를 떠나 있어서 시사만화는 어렵고 취약하다고 생각해 처음엔 망설였지만, 하다 보니 흥미가 생겨서 이어가고 있다. 주 5회 일정으로 마감이 진행되고 있다. 마감일에 대한 압박도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데, 기분 좋은 부담감이다. 일을 하고 있으니 내 자리에 앉은 느낌이 비로소 든다.

만평이 공개되자마자 벌써 화제를 몰고 오고 있는데
지난달 26일 게재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모습을 풍자한 그림이 이슈가 되는 덕분에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윤 총장의 모습을 목이 잘려있는 상태로 그린 것에 대해 ‘지나치다’라는 비판 여론 있고, ‘풍자와 해학의 미를 잘 살렸다’라며 공감해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목이 잘린다’는 표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직책에서 쫓겨난다’는 말의 풍자적 표현이며, 나의 그림 역시 흐드러진 표현을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비판의 여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코믹한 풍자와 해학은 내게 익숙한 일이고, 이로 인해 많이 회자가 되니 오히려 홍보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웃음)

온라인에서는 <말하고 싶다>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하려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무산되어 온라인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그 전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우리나라 미술에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던 시간이 있다. 해방 이후 긴 시간동안 특히 그러했다. 미술은 아름답기만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요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한국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거치고 있었으며, 미술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무관할 수 없었다. 한국의 미술운동 그룹 ‘현실과 발언’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80년 탄생했다. 당대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술의 사회적 맥락을 밝히고 그 역할을 모색했다. 1990년 그룹은 해체됐지만, 작가들은 각자 자리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현실과 발언’은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전시를 준비했고,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진행이 어렵게 됐다. 하지만 이대로 묻기엔 아쉬운 기획이었기에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40대부터 80대, 젊은 작가부터 원로 작가들까지 함께 어울려서 의기투합했다. ‘말하고 싶다’라는 전시 타이틀처럼, 그림을 통해 각자의 현실과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10만 원권 속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박재동 화백이 그린 10만 원권 속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10만 원권에 인물을 그린 화폐가 눈에 들어왔다. 각계의 주요 인사들이 등장하는데, 인물을 화폐로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나?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에 그려진 인물들은 모두 위인이고 영웅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용기 있게 활동하고 있는 영웅이 누구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화폐에 그렸다. 시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나 뜻을 굽히지 않는 의로운 사람들을 ‘10만 원권’이라는 가상화폐 속에 그려 넣어 그 공을 기리고자 했다. 일단 지금 발표한 인물들은 1차 라인업이고, 아직 그리고 싶은 사람들이 더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손잡고 있는 그림도 그려보고 싶다.(웃음) 

■ ‘미투’ 운동, 21세기형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흘러가선 안 돼

이번 전시에서 2018년에 겪은 미투 문제를 언급하며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전시 작품을 통해 목소리를 낸 이유가 궁금하다.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가 겪고 있는 통과 의례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최종적인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피해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피해 주장자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는 본인이 피해를 받았다며 신고만 해도 피해자로 분류되어 보호를 받고,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없어 가해자로 지목되면 일방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현재로서는 부족하다.

지난 여름 경향신문 강진구 기자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한 합리적 의심과 토론을 제의했지만 2차 가해로 몰려 기사가 삭제되고 언론사 내부 징계를 받았다. 안타까웠다. 21세기형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개선과 관련해 중요한 변곡점으로 떠오른 만큼, 더 많은 대화와 논의가 필요하지만, 누구도 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당사자인 내가 먼저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전시를 통해 목소리를 냈다.

SBS와의 소송도 계속되고 있다. 정정 보도 청구 소송에서는 1심과 2심 모두 패소했는데?
사건의 진위여부가 아닌, 보도의 타당성에 대한 소송이다. 판결 내용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미투 혐의에 관련한 재판도 없었고 유죄판결을 받은 바도 없다. 반론 보도 재판에서도 이 점은 인정된 부분이다. 

미투 고발 당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것은 내가 “만나자마자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라는 내용이었다. 2011년 8월 17일에 발생한 모든 일을 7년이나 지난 2018년 2월 26일에 명확하게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땐 “내가 정말 그랬을까?”라는 반문을 먼저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짜고짜 아니라고 단언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 아닌가. 피해주장 당사자(이 모 작가)는 결혼식의 주례요청을 부탁하는 자리인 만큼 일생의 강렬한 사건이었겠지만, 나는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잡아떼는 것처럼 상황이 진행됐다.

▲박재동 화백
▲박재동 화백. ⓒ김재성 사진작가

그의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어려운 점 투성이다. 이 모 작가를 만난 기억은 있지만, 그의 주장과 실제 만난 장소는 매우 차이가 있다. 법정 진술 이전에도 이미 이 모 작가는 여러 차례 장소를 바꾸어 말했다. 동선이 아닌 성추행 장소로 지목한 곳이 달라졌다. 밀폐된 식당에서부터 카페로 다시 식당으로 바뀐다. 또한 부천 식당이라고 했다가 부천인지 서울인지 모른다고 진술을 바꾸기도 했다. 바(Bar)에서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 장소에 간 적도 없다. 내가 그 장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정을 하고, 직접 시뮬레이션까지 해봤다. 테이블 높이 상 범행을 저지르려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에서 몸을 틀어야 가능한 각도인데, 부지불식간에 이게 가능한 행동인가? 

나는 처음부터 만남의 장소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었다고 밝혔다. 영상진흥원 존(ZONE)에 붙어있는 야외 테라스 혹은 식당으로 기억하고 있어 이같이 밝혔다. 또한, 이날은 ‘부천국제만화축제’ 개막일이었기에, 진흥원 밖으로 택시를 타고 외부에 나가는 것은 시간ㆍ일정 상으로 절대 불가능했다. 오전부터 행사와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자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정확한 시간 확인을 위해 연락을 돌려보니 YTN 기자가 나와 오후 2시까지 함께 있었다고 확인을 해줬다. 이 모 작가는 내가 자신을 1시에 만났다고 했지만, 이 주장도 결국 오류가 있는 것이다.

이 모 작가가 날 찾아온 것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세네갈 프로젝트 여행을 앞두고 있었기에 일정에 부담을 느껴 주례를 거절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주례를 부탁하러 온 자리에서 만나자마자 치마에 손을 집어넣은 나에게 재차 부탁한 것이다.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주례를 재차 부탁하는 피해자의 입장은 당연하고, 출국을 앞둔 나의 주례 거절은 문제 삼는 재판장의 결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 주장의 일관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치밀한 점검 없이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은 있어선 안 될 일이 아닌가.

2016년 11월 만화가협회에서 펴낸 ‘불공정 노동행위 및 성폭력 사례집’에 실린 이 모 작가의 성폭력 사례 삽화를 그린 사람에 관해서도 주장이 번복됐다. 녹취록과 법정에서 한 진술이 완전히 바뀌는 부분들이 판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사례집에 담긴 글과 그림의 출처가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 때문이다. 삽화, 그리고 그와 함께 실린 글의 어디에도 SBS 방송을 통해 폭로하고 강조한 “주례를 부탁하러 만난 자리에서, 만나자마자 치마 밑으로 손이 들어와서 제지했다”라는 내용은 없다. 

2017년 5월, 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선거를 앞두고 나를 둘러 싼 성희롱 관련 소문을 듣고,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이 모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던 만화계 여자 후배는 이 모 작가뿐이었기 때문이다. 공개된 통화 녹취록은 나 모르게 이 작가가 녹음을 한 뒤 법정에 제출한 것이다. 녹취록을 보면, 이 작가는 내가 묻기도 전에 ‘자신이 삽화를 그렸다’고 다섯 차례에 걸쳐 말하며 이 부분을 강조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이 작가는 삽화의 글을 직접 썼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 작가는 그 글을 노 모 작가가 썼으며, 글과 삽화 부분 모두 이 작가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 행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가 가장 중요할 터인데, 정작 행위 부분에 있어 이 작가의 말이 바뀌는 것에 대해 법원은 깊이 주목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불공정 노동행위 및 성폭력 사례집’을 통해 언급한 부분과 언론에 나와서 한 말이 바뀌는 것에 좀 더 집중해서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2016.11. 만화가협회에서 펴낸 ‘불공정노동과성폭력 피해 사례집'에 실린 웹툰작가인 이 모 작가가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당했다는 성폭력 사례가 담긴 삽화
▲2016.11. 만화가협회에서 펴낸 ‘불공정노동과성폭력 피해 사례집'에 실린 웹툰작가인 이 모 작가가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당했다는 성폭력 사례가 담긴 삽화. 그러나 이 모 작가는 박재동 화백과의 전화통화에서는 자신이 이 삽화를 그렸다고 수차례 밝혔음에도, 기자와의 통화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고 강하게 부인했다.(자료=한국만화가협회)

■확실한 검증 없는 현재 ‘미투’ 방식, 누군가에겐 사회적 죽음 안겨

우리나라 미투 주장과 그 보도에 있어서 분명 성폭력 피해자들도 존재하지만, 가짜 미투(기획미투)와 관련해 무고한 사람이 생겨 문제가 발생한 것들이 있다. 미국의 경우 ‘피해자’가 아닌 ‘피해주장인’ 혹은 ‘피해호소인’의 지칭을 사용할 정도로 철저한 조사와 신중한 보도를 하는데, 한국의 언론들은 한쪽에 치우친 보도가 나오는 편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느 날 집 앞 슈퍼를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날 보며 미소를 지어줬다. 나를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한 번의 웃음을 보니, 조금 살 것 같더라.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려고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쾌감만 준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보도가 나간 후 나는 모든 것이 쓰나미에 쓸려나간 듯한 무력감을 경험했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지고, 사회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듯하다. 인격적인 살해를 당해 더 이상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죽음이 더 명예롭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작은 티끌에도 좌절감과 상실감이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부에서 폭발할 뿐, 그걸 이 사회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보통은 자신이 정말 억울하고, 떳떳하다면 끝까지 살아남아 결백을 주장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여러 일을 많이 겪어 면역이 생겼거나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면 버텨낼 수 있겠지만, 보통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난과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다. 인격적으로 살해를 당하고, 스스로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심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져가는 자신의 나머지라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박원순 시장의 경우도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나는 반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생겼다는 자체로도 견디기 어려워진다. 양심적인 사람들은 작은 티끌만으로도 못 견디는 것이다. 그런 손가락질이 사람을 완전히 파괴하고, 육체는 살아있더라도 정신의 회복이 어렵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처벌ㆍ보호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황으로 규정하는 섣부른 판단은 진짜 가해자와 진짜 피해자를 보는 눈을 흐리게 할 것이다. 고발을 통해 피해자들이 진짜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이 없음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증명하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말한 그대로가 사실로 치부되는 것이다. 하지 않은 행동이 그런 식으로 기정사실화 된다. 법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게. 

■역사를 비추는 민중의 촛불, 작품에 담고파

현재 연재하고 있는 만평 외에 하고 싶은 것이나 계획이 있다면?
미투 전후로 나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삶의 바닥을 마주하며 생각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 사회의 갑으로 살아왔다는 점이다. 명문 학교를 나오고 교사, 교수로 일을 하면서 을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자의는 아니지만 을의 입장이 되어서야 을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다. 이제야 비로소 타인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미투 사건 이후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손실도 있고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고통을 겪고 있지만, 노력해서 극복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이다. 나의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기에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재동 화백 ‘촛불’(출처=한겨레신문)
▲박재동 화백 ‘촛불’(출처=한겨레신문)

지금 하는 일 외에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차근차근히 해볼 생각이다. 아울러, 꼭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있던 지난 2016년 말, 한겨레신문 1면에 들어갈 만평을 그리게 됐다. 1면 전체에 들어갈 만평을 의뢰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시민의 힘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고, 자연스레 촛불을 떠올리게 됐다. 그때 그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저 행렬이 어디서 시작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6월 민주 항쟁,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4ㆍ19혁명, 3ㆍ1운동, 동학농민운동… 지금까지 우리 역사엔 촛불을 든 수많은 민중이 존재하지 않았나. 그걸 다 꺼내서 그려보고 싶어졌다. 내가 살아온 시대를 젊은 친구들을 모를 수 있으니 내가 직접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주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보고 싶다. 그들의 애환과 고통, 즐거움까지 촛불 위에 담아보고 싶다. 우리의 일상은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치며 만들어진 것이라고 후손들에게 말해주고자 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나는 행운이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억울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이겨낼 힘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평생이 가도 사라지지 않을 고통의 무게를 줬지만, 이를 함께 견뎌주는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어 감사하다. 더불어, 지금까지 이런 나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이야기할 자리가 없었는데, 기회를 주어서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