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작품을 만들어낸 안무가나 무용수가 아닌, ‘춤’의 존재론을 다룬 책이 나왔다. 『이 춤의 운명은』은 하나의 춤이 탄생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사라지는지 그 굴곡진 사연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춤을 떠올렸을 때 각자 머릿속에 그려지는 어떤 장면, 특정한 자세가 있을지 모른다. 처음 가 본 엄숙한 공연장 분위기에 압도된 채 마주한 무용수의 힘찬 발끝, 칼군무를 자랑하며 동선을 딱딱 맞춰내는 텔레비전 속 아이돌 그룹, 혹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깃발의 펄럭임까지. 그러나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장면만으로 그 춤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춤은 추어지는 그 순간에 존재하며, 그렇기에 매번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춤은 끊임없는 사라짐을 통해 살아남는다.
저자 정옥희는 원작에 대한 기존 관념을 바꾸고 각 작품들에 얽힌 우여곡절을 주제로 열두 개의 춤 작품을 골라 이야기한다. 처음 무용을 배운 순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무용을 연구하게 된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담았던, 또는 가까이서 함께했던 춤의 기억을 더듬는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전이나 획기적인 기획과 같은 거창한 기준을 벗어나 선택된 작품들은, 춤 자체의 독특한 습성인 자유로운 움직임을 펼쳐 보인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존재하고 있던 이질적인 춤 작품들을 마치 별자리처럼 한 자리에 놓고 바라보는 이 책은, 그러한 연결 가운데 ‘원작’에 대한 통념을 비튼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작품의 시작이자 중심축이 되어 왔던 원작의 권위를 지우는 작업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춤의 형체를 공중에 흐트러뜨리는 과정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파생되는 것이다. 원작은 이제 하나의 모티프, 또는 한 조각 파편으로 남는다.
『이 춤의 운명은』에는 저자 정옥희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린, 총 열두 개의 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책에선 대체로 초연된 시대 순으로 흐르지만, 얼마든지 다르게 읽어 볼 수 있다.
위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주제 아래 몇 가지 작품들을 묶어 소개했으나 젠더와 계급, 인종문제, 보존과 복원, 저작권의 독점과 공유, 예술작품의 정체성, 국제 정세와 갈등, 테크놀로지의 응용, 전염병 시대의 대안 등, 춤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와 키워드를 찾아내 쪼개고 다시 연결해도 좋다.
저자는 “조각난 기록 위에 상상이 더해지든, 다른 예술가에 영감을 주어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지든 간에 언제나 새롭게 추어지는 춤은 대견하고 장하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춤을 향한 우리의 고정된 시선을 흔들고 자유롭게 바라보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춤 현장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전하기 위해 작품별 이미지들을 엄선해 실었고, 「들어가는 말」에는 고전발레, 모던댄스, 포스트모던댄스, 컨템퍼러리댄스로 이어지는 예술춤의 역사가 간추려져 있어, 자칫 생소할지 모를 춤의 세계로의 진입을 돕는다.
한편, 『이 춤의 운명은』의 저자 정옥희(鄭玉姬)는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의 경계에 대해 탐구한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공역서로 『발레 페다고지』(2017), 『미디어 시대의 춤』(2016)이 있다.
정가 19,000원.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