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70년대 안국동 화랑가의 명소 서울화랑에 얽힌 추억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70년대 안국동 화랑가의 명소 서울화랑에 얽힌 추억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12.2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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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안국동 로타리에서 조계사 뒷편으로 향한 좁은 골목길을 한 15미터 들어가면 대성승복이란 옷가게가 나오는데 그 건물에  서울화랑이 있었다. 1970년에 문을 열어서 70년대 후반까지 존속했다.

주인은 홍대 디자인과를 나온 미모의 재원 이혜란 씨. 70년대 중반 단색화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고 이동엽 (당시 30대 초반)과 열애 중이었고 나중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1970년이면 현대화랑이 문을 연 해이다. 현대화랑, 동산방화랑, 명동화랑, 진화랑, 양지화랑, 조선화랑, 문헌화랑 등 12개 화랑의 대표들이 모여 화랑협회'(초대 회장은 김문호 명동화랑 대표)를 결성한 것이 1977년이니 당시 인사동 일대의 화랑은 모두 합쳐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1979년에 동숭동으로 이전하는 미술회관은 작은 이층 목조건물인데 1974년에 조계사 맞은 편에 문을 열었다. 1977년, 100억불 수출을 달성한 이 무렵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유일한 공공 미술회관이 오늘날 읍 단위의 미술회관 보다 작았다. 1974년,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2층 전시실로 들어가니 웬 다부진 체구에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소파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무지의 캔버스 천에 상징적인 추상적 형태를 그린 그림들이 사방 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전시의 주인공은 국전사상 추상화로 대통령상을 최초로 거머쥔, 풍문으로만 듣던 박길웅이었다. 그 무렵 미술회관은 나중에 정관모 성신여대 교수가 미협이사장으로 등극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청년작가협회가 창립전(1974)을 가진 곳이다.

나는 김광우의 설치조각 작품 <자연+인간+우연>을 이때 처음 보았다. 청년작가협회는 학연을 초월한 청년미술단체로 학술세미나와 전시, 회지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안면도 등 자연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975년 이 시기의 미협회원은 약 2천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3만 명 정도인 지금과 비교하면 참으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언젠가 이태현 선생이 당시의 미협 명부를 보여주는데 누런 갱지에 가리방(등사)으로 긁은 그 문건은 꼭 중학생 노트 두께였다. 

▲서울화랑이 있었던 건물(사진=윤진섭)
▲서울화랑이 있었던 건물(사진=윤진섭)

한편, 1972년 당시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심사위원인 이우환에 의해 제1석으로 뽑힌 이동엽은 <상황>이란 단색화 작품으로 파리비엔날레 참가작가가 되는 행운을 잡았으나 주최 측에 의해 거부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미협 주최의. [앙데팡당]전은 파리비엔날레 등 국체전 참가작가 선발을 기치로 내건 무감사 전시로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나는 1977년, 1978년, 1982년 전시에 참가하였다.

1973년의  2회전부터는 이전한 덕수궁 국립현대이술관에서 열렸는데, 1977년 전시에서 나는 <어법>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을 본 미술평론가 방근택 선생이 ‘현대예술'지에 쓴 리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받은 최초의 평론이었다. 1950년대 후반, 한국 앵포르멜 미술운동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방근택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ST]  그룹 정기전에서 였다.

당시 방 선생은 40대 후반의 나이로 전성기에 비해 활동력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현대예술’지의 주간을 맡았지만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80년대에는 <공간>과 <미술세계>에 지난 시절의 미술계 뒷 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증언 중에서 특히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걸친 앵포르멜 미술운동의 전개에 관한 부분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당시 미술운동의 주역인 작가 중심의 자기편향적 기술을 견제하고 기록에 의한 객관성 확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파리비엔날레의 참가가 좌절된 이동엽은 한때 실의에 잠겼으나, 이 예기치 못한 거부 사태에 책임감을 느낀 미협 국제분과(위원장 겸 부이사장 박서보)가 1974년의 카뉴국제회화제에 추천, 국가상을 수상했다. 당시 파리비엔날레의 초대 거부 이유는 설치나 오브제, 퍼포먼스 등 전위미술 위주의 경향에 회화가 맞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이우환과 동행하여 [앙데팡당]전을 관람한 동경화랑 사장 야마모토 다카시는 유백색의 조선백자를 연상시키는 이동엽의 작품에 매료돼 이동엽을 동경으로 초대했다. 이동엽은 야마모토 사장의 집에 머물며 그림을그리기도 했으나 얼마 안 돼 귀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1977년에 서울화랑에서 이건용 선생과 함께 이벤트쇼 [조용한 미소]를 벌였다. 이곳은 박현기의 첫 비디오 개인전을 비롯하여 윤형근, 최명영 등 단색화 작가들의 개인전이 열렸으며, 장석원의 [혼인 이벤트]가 벌어져 선데이서울을 비롯한 주간지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기도 했다. 바로 옆 건물에는 화가인 장성진 씨가 운영하던 태인화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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